지난 20일 한국·캄보디아 경찰청 고위급 회의가 열린 서울 미근동 경찰청 제2회의실.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과 체아 페우 캄보디아 경찰청 차장이 회의 직후 공동합의문을 발표했지만 경찰청이 추진해 온 ‘코리안데스크 신설’ 관련 내용은 빠졌다. 캄보디아 측이 완강하게 거부해 언급조차 못 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납치·감금 사태의 주범인 중국계 범죄 조직을 단속하는 데 캄보디아 정부가 소극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자국 영토에서 벌어진 범죄지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대부분 외국인인 탓이다. 캄보디아와의 양자 협상만으로는 실질적인 범죄 예방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3개국서 ‘피싱 구금’ 30만 명
중국계 범죄 조직은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감금·사기 범죄 네트워크를 광범위하게 구축하고 있다. 26일 미국 싱크탱크 미국평화연구소(USIP)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동남아 3개국의 범죄단지 규모는 캄보디아 10만 명, 미얀마 12만 명, 라오스 8만5000명 등 총 3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에 조성된 대규모 범죄단지는 2013년 일대일로 프로젝트 추진 이후 막대한 중국계 자금이 유입되면서 개발된 카지노 복합단지가 모태다. 중국계 범죄 조직은 이 시기 대대적 부패 척결 캠페인인 ‘타호박승(打虎拍?)’을 피해 동남아 지역으로 건너온 뒤 중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카지노 복합단지 개발에 나섰다.
◇GTSEZ·슈웨코코, ‘공포 도시’로
호황을 누리던 동남아 카지노 사업은 중국 정부의 해외 온라인 도박 단속 강화에 이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관광 수입이 급감하자 위기를 맞았다. 돈줄이 필요한 범죄 조직들은 호텔과 카지노 건물을 개조해 사기 범죄 근거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2019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캄보디아 범죄단지는 올해 6월 기준 53곳으로 급증했으며 태국 접경지대에 자리한 미얀마 내 범죄단지는 2020년 11곳에서 올해 27곳으로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중국 안후이성 출신 사업가 자오웨이가 설립한 라오스 골든트라이앵글경제특구(GTSEZ) 역시 2020년부터 피싱 사기 범죄 거점으로 변모했다.
라오스와 미얀마의 범죄단지는 중국계 자본이 치외법권형·준군사형 범죄 거점을 구축해 국가 통제가 사실상 무력화된 공간이다. 현지 권력층과 결탁한 구조인 캄보디아 범죄단지와 달리 라오스 GTSEZ는 중국어가 일상어로 통용되고 베이징 시간과 위안화가 쓰이는 등 라오스 정부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대다. 투자 유치에 목마른 라오스 정부가 99년 임대 방식으로 킹스로만스그룹에 경제특구 개발을 맡기면서 맺은 특구 조항 탓이다. 피싱 사기를 위한 인신매매와 메스암페타민 등 합성마약 유통의 거점으로 지목되고, 카지노를 통한 불법 자금세탁과 멸종위기 야생동물 밀거래까지 잇따르면서 이곳을 세운 자오웨이는 2018년 미국 재무부의 제재 대상에 올랐다.
미얀마 범죄단지는 군부가 세금·보호비를 거둬 범죄 수익을 공유하는 준군사시설 형태로 운영된다. 미얀마 미야와디 일대의 대표적 범죄단지인 ‘슈웨코코’는 중국 후난성 출신 셔즈장과 카렌국경수비대 수장 사우 치트 투가 결탁해 조성됐다.
이런 상황에서 범죄 조직은 국경을 넘어 초대형 다국적 기업과 비슷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미국 의회 산하 미중경제안보검토위원회(USCC) 보고서를 보면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의 범죄 조직은 2023년 한 해에만 약 438억달러(약 62조원)를 벌어들였다. 이는 세 나라 국내총생산(GDP)의 40%에 달하는 규모다.
◇외국인 겨냥 ‘살양판’, 공조 필요
한국인을 겨냥한 범죄가 캄보디아를 넘어 미얀마와 라오스로 확산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이 한층 커지고 있다. 2021년 중국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해외 피싱 사기 단속을 강화하면서 동남아에 거점을 둔 중국계 범죄 조직들은 외국인을 새로운 범죄 대상으로 겨냥하는 추세다. ‘외국인을 잡아먹는다’는 뜻의 ‘살양판(?洋?)’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문제는 중국 정부가 피싱 사기 단속을 명분으로 동남아 각국의 치안·사법 체계에 개입하면서 한국 외교 및 수사당국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점이다. 중국은 지난해 기준 캄보디아 외국인직접투자(FDI)의 59.3%를 차지하는 등 동남아 전역에서 막강한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은 캄보디아와 수시로 대대적인 공동 수사를 벌일 만큼 협력 체계가 잘 구축돼 있지만, 한국은 코리안데스크 신설 논의조차 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
한·미·일 3국 공조를 통해 중국과 캄보디아를 향한 외교적 압박 강도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국경을 넘나드는 범죄의 특성상 단일 국가 차원의 대응으로는 피해 확산을 막기 어렵다는 측면도 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캄보디아는 중국 자본에 의존해 도시를 형성하고 사회 인프라를 구축했기 때문에 중국을 통한 압박이 상당한 효과를 낼 것”이라며 “미국 일본 영국 등과 협력해 캄보디아 경제 제재를 협상 카드로 사용하는 것도 검토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
류병화/김영리/김다빈 기자 hwahw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