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 세월 고급 원단의 주인공은 유럽산이었다. 제냐, 로로피아나, 아리스톤, 스카발…. 100여 년 동안 여러 세대에 거쳐 옷감을 빚어온 이들은 ‘명품 원단’의 대명사였다. ‘아시아의 변방국’인 한국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수출 전성기였던 1960~1970년대에도 한국 섬유업은 품질과 기술력보다는 낮은 인건비로 해외 브랜드 제품을 대신 만들어주는 데 그쳤다.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해외에서 ‘K패션’의 존재감이 높아지자 한국산 프리미엄 원단과 섬유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중소 원단·섬유업체들은 만나기도 힘들었던 글로벌 브랜드의 바이어가 이제는 K텍스타일을 보기 위해 서울을 찾는다. 수십 년간 부침 속에서도 끊임없는 연구로 혁신을 꽃피운 기업들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 원단이 시간으로 쌓아 올린 ‘전통의 미학’이라면, 한국산은 기술로 직조한 ‘미래의 미학’이다. 대표적인 K텍스타일은 효성티앤씨의 ‘크레오라’다. 가볍고 쫀쫀한 스판덱스 섬유로 수년째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다. 아디다스, 나이키, 룰루레몬 등 세계적인 스포츠 의류업체들이 레깅스를 만들 때 크레오라를 사용한다. 지난 8월 한국섬유산업연합회 주최로 열린 ‘프리뷰 인 서울(PIS) 2025’에서는 효성티앤씨 부스가 가장 크고, 북적였다. 알로, 온러닝, 아크테릭스 등 글로벌 패션 브랜드 관계자들이 효성티앤씨와 협력사들을 만나기 위해 총출동했다.
기후변화로 여름이 길어지면서 더 시원하고, 더 가벼운 냉감·초경량 소재도 뜨고 있다. 코오롱인더스트리가 만든 냉감 원사 ‘포르페’가 대표적이다. 글로벌 아웃도어 브랜드들의 관심이 높은 소재다. 더와이인터내셔널 등 중소업체들도 PIS에서 열에너지 반사 기법을 활용한 냉감 소재와 우주복 충전재로 쓰이는 초경량 소재인 ‘에어로겔’ 등을 선보였다.
친환경과 인공지능(AI) 등 새로운 트렌드에서 기회를 포착한 기업도 있다. 플라스틱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다시마 미역 등 해조류, 옥수수 전분, 사탕수수 등 식물성 원료로 만든 원단 등이 새롭게 등장했다. 패션 AI 솔루션 기업 라온버드는 의류 샘플을 업로드하는 즉시 AI가 모델 착용 샷을 생성하는 프로그램을 선보여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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