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월 31일 경주에서 열린 APEC CEO 서밋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한국 정부와 기업들에게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장을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약 14조원 규모의 이 발표는 단순한 하드웨어 공급을 넘어, 한국이 '인공지능(AI) 3대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번 엔비디아의 발표 이전까지만 해도 'AI 3대 강국' 목표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회의적이었다. 한국의 AI 경쟁력을 미국·중국에 한참 뒤처진 5~6위권으로 평가하며,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했었다. 그러나 이번 GPU 26만장 확보는 이와 같은 의문을 상당부분 해소하게 만든 게임 체인저였다. 젠슨 황 CEO의 언급처럼, 한국은 이제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데이터, AI 반도체(HBM) 생산 역량, 그리고 최신 GPU를 동시에 갖춘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특히 피지컬 AI 분야에서 제조업 강국인 한국이 독보적인 비교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쉽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던 3강국 진입이 이제 현실적인 목표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입법의 방향성일 것이다. EU AI법은 강제적 규제 방식으로 고위험 AI에 대해 엄격한 사전 규제를 부과하지만, 최근 EU 내에서도 과도한 규제가 혁신을 저해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반면 미국·영국·싱가포르 등은 민간 자율을 기반으로 한 규제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어느 쪽을 선택했을까.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AI 기술 속도가 워낙 빨라서, 강한 규제를 해도 금세 현실과 어긋날 수 있다'는 이유를 들며 진흥 중심, 느슨한 규제 체제를 택했다. 쉽게 말해 기업들이 AI를 더 잘 키우고 활용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되, 기본적인 안전장치만 두겠다는 것이다. 위반 시 최대 3천만 원 과태료라는 규제를 두었지만, 계도기간을 최소 1년 이상 운영할 예정이다. 어떻게 보면 강한 규제라고 볼 수 있지만, 사실 이 접근은 'AI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겠다'는 정부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그 이외에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거버넌스 체계의 강화다. 국가AI위원회가 '국가AI전략위원회'로 격상되고, 기업마다 최고AI책임자(CAIO)를 두도록 했다. 또한 CAIO 협의회가 신설돼 기업들이 각자 다른 규제 기준에 혼란을 겪지 않도록 조율한다. 이는 규제와 진흥을 동시에 추구하는 균형 잡힌 접근이다. AI 기술은 발전 속도가 빠르고 불확실성이 높아, 사전 규제보다는 사후 관리와 자율 규제가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나아가 데이터, 전력, 인재 등 AI 생태계의 병목 요소들을 해소하는 지원 입법도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 GPU를 확보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AI 강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차세대 루빈 아키텍처 GPU를 운영하려면 막대한 전력과 냉각 인프라가 필요하다. AI 학습에 필요한 고품질 데이터의 수집·활용을 촉진하는 법제 정비도 시급하다. 무엇보다 AI 인재 양성과 유치를 위한 정책적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이 GPU 30만장 시대를 맞아 진정한 AI 강국으로 도약하려면, 규제가 혁신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혁신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법제도가 설계되어야 한다. AI 기본법이 시행 단계에 들어선 지금, 중요한 것은 후속 가이드라인과 법제들도 이와 같은 방향을 유지하는 것이다.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면서도 한국의 강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지혜로운 입법이 지속될 때 비로소 AI 3대 강국으로 가는 법제도적 토대가 단단히 다져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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