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출신 스티븐 허프(64)는 ‘클래식 음반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그라모폰상을 무려 여덟 차례 수상한 명피아니스트다. 현재까지 60장 이상의 앨범을 발표한 피아니스트인 만큼 한평생 연주에만 빠져 살았을 것이라 넘겨짚을 수 있지만, 허프는 오히려 그 반대다. ‘40곡 이상의 작품을 써낸 현대음악 작곡가이자 개인전을 연 화가, 소설과 에세이를 펴낸 작가.’ 이 모든 수식어의 주인공이 바로 허프라서다. 2009년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인류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 등과 함께 그의 이름을 ‘살아있는 박식가들’ 20인 명단에 올린 건 우연이 아니다.
‘다재다능한 음악가’ 허프가 한국을 찾는다. 오는 22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어제의 세계(The World of Yesterday)’를 아시아 초연하기 위해서다. 18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심포니 송 지휘자실에서 만난 허프는 “모차르트,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등 역사적으로 훌륭한 피아니스트들은 자신만의 언어로 악상을 표현하고 기량을 드러내기 위해 피아노 협주곡을 직접 만들어 연주해왔다”며 “나에게도 특별한 경험인 만큼, 무대 위에서 긴밀한 감정적 교류가 일어나고, 청중에겐 도무지 음악의 여운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강렬한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협주곡의 부제인 ‘어제의 세계’는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회고록 제목에서 따온 말이다. 허프는 작품에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빈의 문화와 낭만을 그리워하는 정서를 담았다. 그에게 작곡과 연주 중 더 까다로운 일은 무엇일까. 허프는 “작곡은 굉장히 개인적인 작업이고, 많은 고민과 고통을 겪지만 일단 악보를 출판사에 넘기면 끝이란 생각이 드는 반면, 연주는 아무리 해도 끝이 없단 점에서 차이가 있다”며 “피아니스트는 어젯밤 공연을 아무리 성공적으로 마쳐도 오늘 아침에 일어나선 꼭 연습을 해야만 하는 직업”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음악가로서 두 가지 일을 모두 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기쁨”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또 다른 자작곡인 피아노 독주곡 ‘팡파르 토카타(Fanfare Toccata)’는 국내에서도 친숙하다.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를 위해 작곡한 작품으로, 당시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이 곡을 연주했다. 그해 심사위원이었던 허프는 한국에서 눈여겨보는 피아니스트로 가장 먼저 임윤찬을 꼽았다. 그는 “빅스타인 임윤찬이 견뎌야 하는 스트레스와 압박은 엄청날 것”이라며 “나도 콩쿠르 우승 직후 탈진해서 9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고 했다. “많은 관심 속에서 바쁘게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쳐버릴 수 있습니다. 연주자는 항상 이를 경계해야 하죠. 임윤찬에게 또 하나 말해주고 싶은 건 ‘젊을 때 실패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껏 실수해 봐야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기니까요.”

이번 공연에선 허프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바스크 환상곡 ‘아가타’ 등도 함께 연주된다. 지휘자 함신익이 이끄는 심포니 송이 호흡을 맞춘다. 끝으로 허프는 “미래엔 한국이 클래식 음악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다. 그는 “유럽과 미국에선 클래식 음악이 옛날 문화로 여겨지고, 전통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 음악적 정체성 등이 약해지면서 위기에 처해 있지만, 한국은 굉장히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다”며 “50년 후엔 전 세계 학생들이 한국에 클래식 음악을 배우러 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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