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에는 통화정책도 어렵고 재정정책도 어렵다. 기준금리를 내리자니 물가와 자산 가격이 걱정이고, 그대로 두자니 경기 둔화가 부담스럽다. 재정도 마찬가지다. 써야 할 곳은 끝없이 많지만 국가채무와 금리 수준, 인구 구조를 감안하면 마냥 퍼쓸 수 없다. 혹자의 표현을 빌리면 정책당국 입장에서는 수많은 변수가 얽힌 8차 방정식을 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저성장-저금리-중물가’라는 세 가지 조건이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이고, 이 조합이 앞으로 우리 경제의 기본 시나리오로 거론되고 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나타나도록 떠미는 구조적 요인들을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저출산·고령화로 가계의 저축은 오히려 늘어나는 반면, 기업은 생산성 둔화로 투자를 줄이면서 결과적으로 경제 전반에 초과 저축이 쌓이기 쉬운 구조가 형성됐다. 이런 환경에서는 구조적인 실질금리가 낮게 고정될 수밖에 없다. 프린스턴대 아티프 미안(Atif Mian) 교수의 연구가 지적하듯, 향후 불평등 확대는 이런 저금리 추세를 더욱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는 저성장이다. 일할 사람의 숫자는 줄고, 주요 산업은 이미 성숙 단계에 접어들었다. AI와 같은 새로운 성장동력이 등장하고는 있지만 이들이 경제 전체를 끌어올리는 속도는 기대보다 느릴 수 있다. 마지막은 물가다. 과거에는 저금리·저성장이면 저물가가 따라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런 시대는 거의 끝나가고 있다. 기후위기 대응과 에너지 전환, 공급망 재편, 지정학 갈등이 동시에 비용을 끌어올리고 더 이상 중국의 값싼 노동력에 기대어 저렴한 재화를 계속 공급받기도 어렵다. 완전한 저물가로 되돌아가기보다는 ‘중물가’가 꾸준히 유지되는 그림이 훨씬 현실적인 시나리오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킬러 문항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먼저 통화정책은 단기 금리 조정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중기적인 정책 경로와 함께 설계될 필요가 있다. 최근 한국은행이 연준과 유사하게 점도표 방식으로 향후 1년 정도의 조건부 기준금리 경로를 제시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물가안정 목표 역시 한 번 정해 놓은 숫자를 절대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경제 구조 변화와 중립금리 수준을 고려해 유연하게 재점검할 수 있는 영역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재정정책은 재정준칙을 명확히 세우고 이를 지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OECD 선진국들 가운데 한국은 아직 법에 명시된 재정준칙이 없는 몇 안 되는 예외 국가이다. IMF 역시 고령화 시대의 재정 압력을 감당하기 위해 연금개혁, 세입 확충과 함께 재정준칙 도입을 권고하고 있다. 재정준칙은 지금 당장 쓰는 재정의 효과보다 중요한 것은 장기적으로 감당 가능한 범위 안에서 얼마를, 어떤 원칙에 따라 쓸 것인지에 대한 큰 틀의 합의다. 가계가 소득 중 저축할 몫과 쓸 몫을 미리 정해두듯이 재정도 먼저 지속가능한 총량과 우선순위를 정해둬야 이후의 효율성 논의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과거 ‘고성장-고금리-고물가’ 국면을 경험했고 이웃 일본은 ‘저성장-저금리-저물가’를 오랫동안 겪었다. 그러나 ‘저성장-저금리-중물가’ 조합은 아직 어느 경제도 제대로 답을 내지 못한 새로운 유형이다. 이 조합을 일시적인 예외 상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상당 기간 이어질 기본 환경으로 봐야 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 문제에 대해 단기 처방을 넘어서는 새로운 접근법과 장기적 관점을 함께 갖추는 일이다.
마은성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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