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7년 겨울 새벽, 러시아 혁명의 혼란에 빠진 상트페테르부르크. 스웨덴 영사관의 문이 열리고 한 여성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습니다. 이윽고 그녀는 길가의 시궁창에 고개를 숙이고 구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녀에겐 비밀경찰에 잡혀간 남편이 있었습니다. 생사도 알 수 없는 남편을 찾으러 헤매던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평소 안면이 있던 스웨덴 영사를 찾아갔습니다. 영사는 며칠을 굶은 그녀에게 음식을 내주고,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그녀를 잠시 지켜봤습니다. 그리고는 비릿한 미소를 띠고 용건을 말했습니다. “도와주겠소. 하지만 삯을 치러야 할 거요.” 그녀는 스웨덴 영사가 무엇을 원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챘습니다. 도덕이냐, 나와 남편의 생존이냐. 그녀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날 밤, 그녀는 맹세했습니다. 다시는 굶주린 약자가 되지 않겠다고. 내 운명을 스스로 헤쳐 나가는 승리자가 되겠다고 말입니다.
1920년대 강렬한 그림으로 ‘아르데코의 여왕’이라 불리며 유럽 미술의 한 시대를 풍미한 타마라 드 렘피카(1898~1980). 루이 뷔통과 카를 라거펠트, 마돈나와 잭 니컬슨 등 수많은 명사에게 영감을 줬고, 2020년대 들어 작품이 300억원에 낙찰되는 등 화려한 부활을 겪고 있는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은 이 차가운 밤거리에서 시작됐습니다.

열세 살(한국 나이 15세)이던 1911년, 타마라는 그 꿈을 이뤄줄 것 같은 남자를 만납니다. 상대는 22세의 미남 변호사 타데우시 렘피카. 폴란드 귀족 출신인 그는 법대를 졸업했으면서도 일할 필요가 없어 놀고 있는, 전형적인 부잣집 한량이었습니다. 타마라는 이 백마 탄 왕자님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문제는 경쟁률이었습니다. 이미 10여 명의 여성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거든요.
타마라는 자신의 전략적인 기질을 발휘해 이 상황을 돌파합니다. 경쟁자들이 입은 화려한 드레스 대신 시골 처녀로 분장한 뒤, 살아있는 거위 한 마리를 끌고 가장무도회에 나간 겁니다. 이 엉뚱하고 당돌한 매력으로 그녀는 바람둥이 타데우시의 시선을 훔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타데우시는 그녀를 택했고, 1916년 둘은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17년 터진 러시아 혁명이 모든 걸 바꿨습니다. 거리에서 총성이 울리고 세상이 뒤집혀도 부부는 애써 현실을 외면했습니다. “설마 우리한테 무슨 일이 생기겠어? 우린 부자야.” 하지만 12월의 어느 밤, 비밀경찰이 아파트에 들이닥쳐 남편을 잡아가면서 악몽은 현실이 됐습니다. 타마라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스웨덴 영사를 찾아간 것도 남편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평소 타마라를 눈여겨보던 영사는 대가를 요구했고, 결국 비극적인 ‘거래’가 이뤄졌습니다.
영사의 도움으로 위조 여권을 얻어 핀란드로 탈출한 타마라. 얼마 후 우여곡절 끝에 풀려난 남편과도 다시 만나게 됐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겪은 고통, 재산을 모두 잃고 도망쳤다는 사실,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아내의 ‘거래’…. 남편은 우울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반면 타마라는 그런 남편이 한심했습니다. 자신을 비참한 운명에 빠트린 남편에 대한 원망, 무기력한 남편에 대한 혐오, 그리고 스스로 가족을 구해냈다는 우월감이 뒤섞여 하나의 감정으로 굳어졌습니다. 경멸이었습니다.

1918년 프랑스 파리로 흘러든 부부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일자리를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챙겨온 보석을 팔아 끼니를 때웠지만, 보석 주머니도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딸 키제트가 태어났지만 부부 사이는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남편은 타마라에게 손찌검까지 했습니다. 타마라는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남에게 내 인생을 맡기지 않을 거야.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강한 여자가 될 거야. 그리고 보란 듯이 성공할 거야.”



타마라는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미술에 재능이 있었던 데다 자신을 혹독하게 채찍질하며 매달린 덕분에 그림 실력은 일취월장했습니다. 성공을 위해 화풍도 철저히 전략적으로 선택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빌리면서,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최대한 덜어낸 겁니다. 여기에 타마라는 정통 프랑스 작가인 앵그르처럼 매끄러우면서도 어딘가 은밀한 관능이 흐르는 스타일을 더했습니다. 이런 화풍은 독특하면서도 매력이 넘쳤습니다. 기하학적인 직선과 번쩍이는 금속 광택으로 1920~1930년대의 풍요를 표현한 스타일, ‘아르데코’ 유행에도 딱 맞아떨어졌고요.
여기에 더해 타마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포장하는 천재적인 감각을 발휘했습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녹색 부가티를 탄 자화상’에 이런 전략과 감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실 그녀는 작은 노란색 르노 자동차를 탔지만, 그림 속의 타마라는 당대 최고급 스포츠카인 녹색 부가티 핸들 위에 가죽 장갑 낀 손을 얹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 남성들을 포함한 이 세상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선언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욕망에 충실한 파리 사교계의 ‘스캔들 메이커’였습니다. 대중적이면서도 독창적인 화풍, 여기에 더해 스타성까지. 타마라는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서 ‘아르데코의 여왕’이라 불리게 됐습니다.



타마라의 야망은 멈출 줄 몰랐습니다. 그녀는 이탈리아 최고의 유명인이자 전쟁영웅,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유럽 전체에 명성을 떨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만난 단눈치오는 ‘진상 호색한’이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타마라에게 잠자리를 요구했고, 타마라는 그 유혹을 요리조리 피하며 그림을 그리려 했습니다. 치열한 신경전 끝에 타마라는 결국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한밤중에 도망쳤습니다. 며칠 후, 단눈치오는 파리의 타마라에게 전보를 보냅니다. “나는 당신을 원한다.”
하지만 이 격정적인 전보를 처음 본 건 타마라가 아니라 남편이었습니다. 평소 타마라의 불륜을 눈감아 주던 남편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애증이 뒤섞인 관계였지만 타마라는 남편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남편은 결국 떠나버렸습니다. 타마라는 그동안 그리던 남편의 초상화 속 왼손, 결혼반지가 있어야 할 자리를 미완성으로 남긴 채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이혼의 아픔도 잠시. 타마라에게 인생 역전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헝가리의 귀족이자 대부호였던 쿠프너 남작이 자신의 애인인 나나 데 헤레라의 초상화를 의뢰한 게 계기였습니다. 타마라는 자신의 전략적인 기질을 또다시 활용합니다. 그림을 이용해 애인을 제거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한 겁니다. 타마라는 나나의 얼굴과 몸을 화려하게 그리면서도, 내면은 텅 비어 보이도록 그림을 그렸습니다. 눈빛과 표정은 멍청하고 표독스럽게 묘사했지요. 남작에게 ‘이 여자는 껍데기뿐’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공작이었습니다.
작전은 적중했습니다. 그림을 볼수록 남작은 나나의 천박함과 변덕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반면 이런 작품을 그린 타마라의 매력과 재능은 점점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남작은 나나와 결별하고 타마라를 선택했습니다.

1934년 타마라는 그와 결혼하며 꿈에 그리던 ‘쿠프너 남작 부인’ 작위와 막대한 부를 손에 넣었습니다. 붓 하나로 귀족 타이틀을 쟁취한 셈입니다. 그녀는 1920~1930년대를 가장 완벽하게 캔버스에 담은 화가이자, 시대의 승리자였습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그녀의 앞길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타마라의 동물적인 생존 감각은 결국 사실로 드러납니다. 덕분에 부부는 막대한 자산을 챙긴 채 미국으로 옮겨갔습니다. 타마라는 “붓을 든 남작 부인”, “할리우드 스타들이 사랑하는 화가”로 불리며 화려한 파티의 중심에 섰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두 번째 전성기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깨달았습니다. 이곳에서 자신은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라,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라는 사실을요. 누군가가 별 생각 없이 한 칭찬은 타마라의 자존심을 비수처럼 찔렀습니다. “타마라 남작 부인은 정말 재미있고(she is such fun), 그녀의 그림도 정말 재밌어(her pictures are so amusing).” 영혼을 울리는 감동과 감탄이 아니라,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잠깐의 재미와 웃음이라니. 진지한 예술가를 자처하던 타마라에게는 충격적인 모욕이었습니다.

어느새 시대는 변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 미술계는 추상화풍이 지배하고 있었고, 타마라의 아르데코풍 그림은 ‘철 지난 유행’ 취급을 받았습니다. 타마라는 황급히 유행에 편승해 추상화풍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실력은 빛이 바랜 지 오래였습니다. 뉴욕타임스는 그녀를 “팔레트 나이프로 꽃이나 그리는 여자”라고 조롱했습니다.
좌절은 분노가, 분노는 광기가 되었습니다. 한 갤러리 주인이 그녀의 신작 전시를 정중히 거절하자, 타마라는 그 자리에서 바로 캔버스를 갈가리 찢어버렸습니다. 그녀를 위대한 화가로 만들었던 집념은 이제 병적인 강박이 되어 딸과 주변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말년에 그녀의 전성기 아르데코 그림을 재평가하는 바람이 반짝 불기도 했습니다. 은둔 생활을 하던 타마라는 70대에 접어든 나이로 다시 붓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손은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결과물은 전성기 작품 특유의 칼 같은 선과 빛나는 색채가 사라진, 초라한 모작(模作)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스미는 여기에 덧붙여 냉정한 평가를 내립니다. “나는 이 그림들의 흠 잡을 데 없는 아름다움이 이제 낡아 보인다. 이 작품들은 벼락부자들의 환상을 맞춰주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작품을 보고 난 후, 나는 그 시대가 아닌 지금 현실로 다시 돌아오고 싶어진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그림들이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말처럼 타마라의 그림은 아름답고 매력적입니다. 순간의 감각과 욕망으로 가득 찬 그 화려한 매끄러움이 주는 솔직한 반짝임은 보는 이를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들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안식처는 아닙니다. 어딘가 공허한 뒷맛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마지막도 그랬습니다.
다시 타마라의 이야기. 평생을 자기 뜻대로 세상을 움직이려 했던 그녀, 유언장조차 수없이 고쳐 쓰며 마지막까지 삶의 통제권을 놓지 않으려 했던 타마라는 1980년 멕시코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어머니의 부고를 들은 딸 키제트는 짧게 내뱉었습니다. “음, 이제 끝났어(Well, it’s finished).” 그동안 어머니에게 시달렸던 세월을 생각하며 내뱉은 짧은 탄식이었습니다.
마지막 순간, 타마라는 자신의 뼛가루를 멕시코의 포포카테페틀 화산 분화구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끝까지 극적이고 싶었던 타마라다운 선택이었습니다. 딸은 그 말에 따라 헬리콥터를 타고 화산 위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습니다. 허공에 뿌려진 타마라의 뼛가루는 분화구로 떨어지는 대신 역풍을 타고 다시 헬리콥터 안으로, 딸의 옷 위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마지막 장면까지 완벽하게 연출하려 했던 타마라. 하지만 최후의 순간 헬리콥터 안으로 들이닥치는 바람으로 그 의지는 물거품이 됐습니다. 운명과 의지의 줄다리기, 그 사이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와 더없이 극적인 아이러니야말로 타마라의 삶과 예술을 관통하는 주제이자 독특한 매력의 원천이었습니다.
<i>**이번 기사는 Tamara de Lempicka: A Life of Deco and Decadence(Laura Claridge 지음), Tamara de Lempicka(Gilles Neret 지음), Passion by Design: The Art and Times of Tamara de Lempicka(Kizette de Lempicka-Foxhall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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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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