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 위기 대응이 선택이 아닌 생존 과제로 부상하면서 내년도 ESG 환경은 규제와 투자, 산업 전략이 한꺼번에 시험대에 오르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국내에서는 탄소배출권 시장·지속가능성 공시·K-GX가, 국외에서는 EU CBAM·에코디자인·기후금융이 기업 경영과 자본시장의 새로운 ‘룰’을 규정하는 6대 핵심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 ‘탄소배출권·공시·K-GX’ 영향 주목해야
내년도 ESG 분야에서 주목해야 할 키워드는 ▲탄소배출권 시장 ▲지속가능성 공시 ▲K-GX(녹색 산업 전환) 등 국내 3대 축과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에코디자인 규정(ESPR) ▲기후금융 등 대외 3대 축으로 압축된다. 우선 국내에서는 4차 계획기간(2026~2030년)을 앞둔 탄소배출권 시장이 단순한 환경규제 수단을 넘어 본격적인 자산시장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지가 최대 관전 포인트로 떠오르고 있다.
배출권 연계 ETF·ETN 도입과 선물시장 도입 예고로 외형상 주식·원자재와 유사한 투자 인프라는 갖춰졌지만 거래량 부족과 높은 가격 변동성, 제한적인 정보공개 등 구조적 한계는 여전히 뚜렷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2035년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NDC) 상향과 맞물려 배출 허용 총량 축소, 유상 할당 비율 확대, 이월(뱅킹) 제도 손질이 병행될 경우 국내 배출권(KAU)의 공급 여건은 더 타이트해지고, 중장기 가격 수준도 지금과는 다른 구간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과정에서 탄소배출권은 규제를 준수하기 위한 ‘비용 항목’을 넘어 기업 입장에서는 감축 성과에 따라 재무 결과를 바꾸는 리스크 관리 지표로, 투자자 입장에서는 전통 자산과 상관관계가 낮은 새로운 헤지 자산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특히 전력·철강·시멘트·석유화학 등 탄소집약 산업은 배출권 가격과 정책 변화에 따라 설비투자와 공정 전환 시점, 해외 생산기지 전략을 전면 재조정해야 하는 국면에 직면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지속가능성 공시는 국내 ESG 지형을 재편할 또 다른 변수다. ISSB 기준을 토대로 한 국내 지속가능성 공시기준(KSSB)이 최종 확정되고, 2026년 이후 자산 2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를 시작으로 단계적 의무화 로드맵이 구체화되면 지금까지 IR 자료나 지속가능경영 보고서에 흩어져 있던 기후·ESG 정보가 재무제표와 나란히 비교되는 ‘제2의 재무제표’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공시 범위와 심도가 깊어질수록 기업들은 온실가스배출과 에너지 사용, 공급망·인권 리스크, 이사회 구조 등 비재무 요소를 숫자로 설명해야 하며, 이는 곧 자본시장 평가와 자금조달 조건으로 직결될 가능성이 크다. 국내 기관투자가와 금융회사도 새로운 공시 정보를 토대로 섹터·기업별 기후 리스크 프리미엄을 재산정하고 포트폴리오 구성과 여신 심사에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2035년 NDC와 4차 배출권거래제를 토대로 마련될 K-GX(녹색 산업 전환) 추진 전략도 내년도 ESG 의제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로 꼽힌다. 재생에너지 100GW 확대, 수소환원제철·CCUS 실증 및 사업화, ESS·HVDC를 포함한 전력망 투자, 제로에너지 건축·그린 리모델링, 전기·수소차 보급 확대 등이 K-GX의 축으로 논의되는 가운데 정부가 탄소가격과 배출권 유상 할당으로 확보한 재원을 전환 설비투자와 기술혁신에 재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를 실제로 구현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는 평가다.
규제 강도와 재정·금융 지원 속도가 균형을 찾지 못하면 ‘규제 피로감만 키운다’는 역풍에 직면할 수 있지만, 시장과 기업이 예측 가능한 중장기 로드맵을 신뢰할 경우 녹색 전환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작동할 여지가 크다는 분석도 나온다. 산업계 일각에서는 “이제는 탄소가격을 피하는 전략이 아니라 탈탄소 투자를 통해 새로운 수익원을 만들 수 있느냐가 승부처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CBAM·에코디자인·기후금융, 기업 대외 전략 지배할 듯
대외 변수로는 EU발(發) 규제가 한국 기업의 ESG 전략을 사실상 재편하는 수준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우선 CBAM은 2025년까지 전환 기간 동안 분기별 배출량 보고만 요구하지만, 2026년부터는 전년도 내재 배출량에 대해 매년 5월 말까지 CBAM 인증서를 실제로 구매·제출해야 하는 본격 시행 단계에 들어간다.
그동안 폭넓게 허용되던 기본값(default value) 활용은 원칙적으로 금지되고, 공장별·제품별 실측 데이터와 EU 공인 검증기관의 제3자 검증이 필수가 되면서 철강·알루미늄·비료·수소 등 탄소집약 업종을 중심으로 탄소 데이터를 증명하지 못하면 수출 자체가 막힐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하는 모양새다.
CBAM 비용이 제품 단위 내재 배출량에서 EU 무상 할당분을 뺀 값에 EU 탄소가격과 한국 배출권거래제(K-ETS) 가격의 차이를 곱해 산정되는 구조인 만큼 국내 탄소가격과 무상·유상 할당 비율 역시 기업의 실질 부담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같은 시기 ESPR과 포장재·폐기물 규정(PPWR)은 EU 시장에 진입하는 모든 제품의 설계·포장 단계에서 내구성, 수리·분해 용이성, 재사용·재활용 가능성, 재생원료 사용, 포장 감량, 유해물질 규제 등을 요구하며 사실상 ‘순환경제 기준’을 강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의류·신발·가전·가구·화학·생활용품 등 광범위한 소비재 업종이 규제의 직접 대상인 만큼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자사 제품이 에코디자인 1차 대상인지 여부, 포장재 재질·구조·라벨링이 PPWR 기준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전사적 점검과 사양 변경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특히 디지털 제품 여권(DPP) 도입이 본격화되면 제품의 생산·유통·수리·재활용 이력까지 디지털로 추적·관리해야 하는 만큼 국내 기업의 데이터 관리 체계와 공급망 협력 구조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글로벌 차원에서는 파리협정 목표 달성을 위해 연간 CPI 기준으로는 2030년까지 8조~9조 달러에 달하는 기후 투자가 필요하다는 분석 속에 녹색채권·전환채권·지속가능연계대출(SLL)·블렌디드 파이낸스 등으로 대표되는 기후금융이 이미 ‘조(兆) 단위’ 시장으로 성장했다. 2026년에는 신규 기후 재원 목표(NCQG) 구체화와 적응 재원 3배 확대, 손실·피해 기금과 녹색기후기금(GCF) 보강, 다자개발은행(MDB) 자본 확충과 민간 자본 레버리지 논의가 G20과 COP 무대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질 전망이다.
이는 ‘누가 얼마를 어떤 조건으로 부담할 것인가’를 둘러싼 선진국·개도국 간 형평성 공방을 불러오는 동시에 각국 금융권과 기관투자가에게는 기후 리스크와 전환 기회를 동시에 반영하는 새로운 투자 기준 마련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국내 금융권과 기업 입장에서는 탄소배출권 시장, 지속가능성 공시, K-GX 정책 방향이라는 국내 변수 위에 CBAM·에코디자인·기후금융이라는 외부 변수가 겹쳐지는 만큼 2026년을 단순한 ‘규제의 해’가 아니라 '자본과 기술, 산업 구조를 재편하는 ESG 실전의 원년'으로 받아들이고 선제적인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결국 내년도 ESG 의제는 규제 대응과 비용 통제를 넘어 탄소·공시·제품·금융을 아우르는 통합 전략을 얼마나 빠르게 구축하느냐가 최대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이미경 한경ESG 기자 esit91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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