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9% vs 0.78%’. 한국과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혁신 의약품 지출 비중이다. 한국 건강보험 등이 신약에 지출하는 비용은 선진국 중 가장 낮다. 글로벌 제약사는 물론 국내 제약사조차 한국에 신약 출시를 미루거나 포기하는 사례가 잇따르는 이유다. 그간 높은 약가 부담을 감수하던 미국 정부가 자국 약가를 최혜국 수준으로 대우해달라고 제약사들에 요구하면서 세계 의약품 시장도 요동치고 있다. 한국 정부가 10여년간 손대지 않았던 약가 제도 개편에 나선 배경이다.
한국은 세계서 신약 가격이 가장 낮은 나라로 꼽힌다. 건강보험 약품비 중 신약 지출 비중은 13.5%(2017~2022년 누적 기준)로 튀르키예 16.1%보다 낮다. 신약 허가 신청을 한 뒤 환자 치료에 쓰일 때까지 걸리는 기간도 길다. 미국제약협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한국에서 신약 허가엔 28개월이, 건강보험 시장 진입엔 18개월이 걸렸다. 허가 신청을 한 뒤 46개월이 지나야 환자가 보험 혜택을 받고 약을 쓸 수 있다는 의미다. 미국에선 4개월, 일본은 18개월 만에 약을 쓸 수 있다.
한국을 신약 출시 후순위로 미루거나 신약을 철수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코리아패싱’이다. 한국의 저렴한 약가가 그대로 노출돼 중국 등 다른 나라와 약가 협상을 할 때 ‘위험 요인’이 되면서다. SK바이오팜의 뇌전증 신약 ‘엑스코프리’는 미국에 2020년 5월 출시됐지만 국내에선 5년 6개월 뒤인 이달 초에야 시판허가를 받았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약가 정책 기조를 바꾼 것도 한국 정부엔 부담이 됐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미국제약협회 관계자들이 직접 한국을 찾아 정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의 약가 실무자들을 만나고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전한 것은 ‘위기감’이다. 이대로면 한국 환자들은 더이상 혁신 신약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란 취지다.
약을 쓰는 환자군(적응증)이 늘면 약가가 내려가는 구조도 바꾸기로 했다. 미국 머크(MSD)의 면역관문억제제 ‘키트루다’처럼 하나의 약으로 여러 질환을 치료하는 항암제가 늘어나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이전엔 약가 부담 탓에 한국에선 신규 적응증 승인을 미루는 사례가 많았다. 환자들이 더 효과적인 치료제를 쓰지 못했다는 의미다.
다만 제약사들의 개발 동력이 떨어져 생산이 줄고 있는 퇴장방지의약품, 필수의약품 등은 약가를 좀더 높이기로 했다. 연구개발(R&D) 비용을 많이 쓰는 혁신형 제약기업도 다른 제약사보다 제네릭 약가를 좀더 받을 수 있다. 매출 대비 R&D 비율이 상위 30%인 기업은 제네릭 약가를 오리지널의 68%까지 높여 받게 된다. 나머지 혁신형 제약기업은 60%, 신약개발을 위한 임상 2상 승인 실적이 3년 간 한 건 이상인 기업은 55%까지 약가가 정해진다.
약가 사후관리는 매년 4월과 10월로 정례화한다. 수시로 이뤄지는 약가 조정 탓에 기업들의 사업 불확실성 크다는 요구를 반영한 조치다. 신약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조정하는 절차도 3~5년마다 주기적으로 시행해 약품비 지출을 관리하기로 했다. 권용진 서울대병원 교수는 “성분과 효능이 같은 제네릭의 갯수를 다섯 개 이하로 규제할 필요가 있다”며 “국내 제약사들이 제네릭보다 신약 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규제를 개선하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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