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서울 이화여대 ECC 삼성홀에서 개막한 김용걸발레단의 송년 공연 '호두까기 인형'은 여성 드로셀마이어에게 아이들의 꿈을 여는 신비한 인도자 역할을 맡겼다. 차갑고 강인한 시선 속에서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드로셀마이어가 클라라에게 호두까기 인형을 건네는 장면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부드러움 안에 숨어 있다는 걸 은유하고 있었다.

2025년 연말 시즌을 장식하는 김용걸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해설이 있는 명품 발레'는 기존 작품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구조와 인물, 무대 기술을 대담하게 재배치해 신선한 감각을 보여준다. 13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작품은 전통적인 연말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대신 새로운 시도를 꾀한 연출이 돋보였다.
김용걸은 기존 호두까기 인형의 문법을 크게 세 가지로 바꿨다. 우선 주변부 인물에 지나지 않는 드로셀마이어를 서사의 주체로 키웠다. 원작에서 마법사이자 클라라의 대부로 나오는 드로셀마이어는 호두까기 왕자를 둘러싼 마법과 모험의 발단을 제공한 뒤 비중이 크게 줄어드는 보조적 역할에 머문다. 이번 공연엔 여성 드로셀마이어가 등장해 내레이션을 읊으며 관객의 이해를 돕는 해설자이자 극의 진행자로 나선다. 김용걸 예술감독은 "'왜 드로셀마이어는 늘 남성이어야 하며 조력자로만 존재해야 하는가'란 질문에서 이 캐릭터가 출발했다”고 말했다. 그는 "발레가 대사 없는 장르라는 점을 고려하면 처음 발레를 접할 때 다소 어려울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 드로셀마이어가 내레이션을 하도록 구상했다"고 설명했다.

LED영상을 적극 활용한 건 기존 호두까기 인형에 익숙한 관객들이 김용걸의 '호두까기 인형'을 새로운 작품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드는 '한 수'다. 흩날리는 눈발, 눈내리는 숲, 궁전, 환상의 세계 등 시각적인 전환이 매끄럽게 이어지면서 관객의 몰입을 극대화했다.
도시의 깜깜한 밤을 나타낸 무대 위 LED 영상 속 눈송이가 내리는데, 결정까지 세세히 표현된 눈송이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설렘을 가득 안은 행인들 사이를 파고든다. 1막의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클라라와 호두까기 왕자의 2인무는 거대한 무대장치인 트리가 아닌, 오너먼트를 형상화한 LED 구슬 영상을 배경으로 이어진다. 비교적 작은 공연장임에도 불구하고 무대가 확장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LED영상이 장면 전환과 서사의 핵심 장치로 충분히 활용됐기 때문이다.
압축적인 군무와 안무의 구성도 기존 버전과 차이가 있다. 수십명의 발레리나로 꾸미는 '눈송이 왈츠(1막)'와 '꽃의 왈츠(2막)'는 김용걸의 무대에서는 7인으로 대폭 축소됐다. 대신 밀도 높은 움직임으로 7인의 안무를 촘촘하게 짰다. 2막의 디베르티스망에서 클라라를 프랑스 인형들과 그리고 꽃의 왈츠에 함께 등장시킨다. 수동적인 캐릭터로 남겨졌던 클라라가 무대 중앙에서 춤을 추는 일은 캐릭터의 성장과 모험심을 보여주기에 적합해 보였다.

김용걸 감독은 "한여름의 뜨거운 날씨 속에서 차가운 겨울의 이미지와 눈송이를 상상하며 올해 호두까기 인형을 준비했다"고 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면서도 어른의 감성을 놓치지 않으려 한 김용걸 감독의 의도는 공연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익숙한 공연 이름 아래 낯선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김용걸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은 충분히 감상해볼 가치가 있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김용걸 예술감독은
김용걸은 프랑스 파리오페라 발레단에서 활약한 최초의 한국인 남성 무용수였다. 국립발레단에서도 주역으로 뛰었고 퇴단 후에는 창작 활동과 후학을 양성하며 현재의 김용걸발레단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클래식 발레 기반 위에 현대적인 감각과 실험적 연출을 결합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발레의 외연 확장에 기여하고 있는 1세대 발레리노로 불린다.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