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에 자주 다니시는 분들은 같은 동남아라도 적도를 중심으로 북반구와 남반구의 다른 기후 체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지역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태국·베트남·필리핀 등 북반구 국가들은 대개 한국처럼 여름 시즌이 우기지만, 적도 밑에 위치한 인도네시아는 남반구 몬순의 흐름을 따라 한국의 겨울 시즌이 우기다. 전통적인 ‘동남아 우기’는 그 패턴과 절기가 국가마다 다르지만, 올해는 이 구분이 사실상 무너졌다. 우기인 지역뿐 아니라 우기가 아닌 지역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폭우가 발생하며 여러 지역에서 침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특히 적도 부근에서는 사이클론이 거의 형성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올해는 폭이 좁은 말라카 해협 인근에서 이례적으로 큰 공기 회전력이 발생해 인도네시아 북부에 강한 비구름대를 밀어 넣었고, 태국 남부 역시 계절적 통념을 넘어선 강우량을 기록했다. 이는 기후변화가 동남아 몬순 기후 구조의 근본적 안정성을 흔들고 있다는 신호다.
하지만 폭우가 재난으로 확대되는 과정은 자연 현상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동남아 대도시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빠른 도시화 속도를 보였지만, 배수·하천·도시계획 등 핵심 인프라는 이에 걸맞게 정비되지 않았다. 도시가 팽창하는 동안 자연 유수지와 저지대 습지는 주거지·공장·상업지로 전환되었고, 하천은 길이가 짧아지고 폭이 좁아져 빗물을 받아낼 여유가 사라졌다. 그 결과 평상시에는 문제가 드러나지 않던 도시 구조가 폭우가 쏟아지는 순간 순식간에 붕괴한다.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는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의 대표적 사례다. 지하수 과다 사용과 연약한 해안 지반 탓에 도시 일부가 여전히 연간 수 센티미터씩 가라앉고 있으며, 강우량이 조금만 늘어도 배수 시스템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 방콕은 운하 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침수 범위가 예측보다 훨씬 넓어지며, 해수면 상승이 겹치면 물 빠짐이 더욱 더뎌진다. 마닐라는 도시 외곽까지 무허가 정착지가 퍼져 있어 배수로 확장과 재개발이 구조적으로 어려운 도시다. 태국·말레이시아의 지방 도시들도 경제 중심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방재 투자가 뒷순위로 밀리면서 기본적 배수 능력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태다. 자연재해가 아니라, 도시 인구 과밀이 키운 인재(人災)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여기에 플라스틱 쓰레기와 폐기물 문제가 결합하면서 홍수는 순식간에 통제 불가능한 형태로 변한다. 동남아 여러 도시에서 비가 내리기 전부터 배수로는 이미 플라스틱으로 절반 가까이 막혀 있다. 폭우가 쏟아지면 이 쓰레기들이 하천과 배수관을 막아 물의 흐름을 차단하고, 역류를 일으켜 피해를 더욱 키운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북부에서는 떠내려온 목재와 토사가 불법 벌목 및 무분별한 토지 개간과 관련이 있다는 조사도 진행 중이다. 산림 훼손으로 인해 홍수의 완충 기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재난 대응 체계 역시 구조적 취약성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많은 동남아 국가들은 재난이 발생한 뒤 복구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사전 예측 시스템, 조기경보 체계, 예방적 인프라 투자 등은 항상 뒷순위로 밀리고,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대규모 방재 사업은 중단되거나 지연된다. 자카르타의 해안 방벽 공사나 방콕의 운하 복원 프로젝트가 수년째 진전을 보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자연재해가 대응에 가장 취약한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더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도록 만든다. 홍수는 덜 개발된 지역에서 가장 낮은 지대에 살면서 불안정한 생계에 의존하는 취약계층에 훨씬 큰 충격을 준다.
이번 홍수는 각국에 시급한 대응 전략과 실행 의지를 묻고 있다. 인도네시아에는 수도 이전을 포함하여 기존 도시들의 배수 능력 향상을, 태국·말레이시아에는 지역 간 기후 대응력의 격차를, 필리핀에는 산림 훼손의 위험성을 다시 상기시켰다. 공통된 메시지는 명확하다. 기후 위기는 더 이상 지역적인 ‘환경 문제’가 아니라 국가 운영과 발전의 중심 의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해법의 방향은 기술적으로도, 정책적으로도 이미 제시되어 있다. 첫째, AI·데이터 기반 홍수 예측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싱가포르는 도시 전역에 수문 센서를 설치해 실시간 모니터링을 하고 있고, 방콕도 AI 기반 강우 예측 시스템을 시범 운영 중이다. 둘째, 도시의 수리(水利) 구조 재설계가 필요하다. 단일 배수로 확장이 아니라, 하천·운하·빗물 저류지·지하 배수망을 통합적으로 다시 짜는 장기 도시 계획이 필요하다. 셋째, 기후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사회적 안전망 강화가 필수적이다. 이번 사태에서도 보듯 홍수의 피해는 언제나 가난한 지역에 집중되며, 재난은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경험은 동남아 국가들에 중요한 참고 모델이 될 수 있다. 서울은 반복적인 침수와 하천 범람을 극복하기 위해 도시계획·하수도·물순환 시스템을 지속해서 재설계해 왔고, 이는 스마트시티 기술과 결합해 국제적으로도 주목받는 사례가 되었다. 인도네시아·베트남·말레이시아의 대도시 등과 진행 중인 협력 프로젝트는 단순 기술 이전을 넘어 기후 인프라를 함께 설계하는 장기 파트너십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크다.
동남아에는 앞으로 더 많은 비가 올 것으로 예상되는데, 특히 남반구에 위치한 인도네시아는 1~2월에 가장 비가 많이 온다. 몬순의 질서가 흔들리고 해수면 온도가 계속 상승하는 한, 폭우의 빈도와 강도는 지금보다 강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홍수의 피해가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반복되는 동남아 홍수 피해는 발전하는 경제 수준에 걸맞게 효율적이고도 실질적인 홍수 예방, 예보 및 대응 시스템을 구축하는 앞으로 10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에서 매년 여름 장마와 태풍 등 재해를 맞이하며 경험과 기술 노하우를 쌓아 올린 한국과의 협력도 깊게 진전될 것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이성득 인도네시아 UNAS경영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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