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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리딩 기업은 어떻게 기업가치를 높였나[스페셜 리포트]

입력 2026-01-05 06:01   수정 2026-01-05 10:32

[한경ESG] 스페셜 리포트 - 거버넌스 혁신과 밸류업 2.0 ③·끝



세계 자본시장을 둘러보면, 기업가치 제고(value-up)를 향한 노력은 사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은 수십 년 전부터 자본비용을 기준으로 경영을 설계해왔고, 유럽은 지속가능성과 지배구조를 기업가치의 핵심축으로 삼아왔다. 일본은 지난 10여 년간 시장의 신뢰 회복을 위해 체질 개선을 밀어붙이며 기업이 어떻게 스스로 가치를 높일 수 있는지 제도적 기반을 정비해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보면, 한국의 출발은 분명 늦은 편이다. 한국 기업들이 기업가치 제고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공시 투명성, 자본효율성, 이사회 중심 경영, 주주와의 소통 같은 요소는 오래전부터 선진국 시장에서 당연한 경영 언어였지만, 우리는 이제야 그 언어를 체계적으로 익히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늦었다고 해서 뒤처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들이 이미 겪은 시행착오와 성공 사례를 참고해 더 빠르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제 어떤 감각으로, 어떤 속도로 우리만의 밸류업 여정을 설계하느냐다.

1. 미국, 시장이 스스로 경영을 교정하다

기업가치 제고라는 개념이 가장 자연스럽게 정착된 곳은 미국이다. 미국에서는 밸류업을 위해 별도의 정책 프로그램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본시장이 이미 기업이 지켜야 할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으며,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기업은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되거나 퇴출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준’은 단순한 회계적 성과가 아니다. 핵심은 자본비용을 지속적으로 상회하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가, 즉 투하자본이익률(ROIC)과 가중평균 자본비용(WACC)의 관계다. 흔히 “미국은 숫자가 경영을 통제한다”고 말하지만, 그 숫자의 본질은 매출이나 단기 이익이 아닌 자본효율성이다.

미국 기업들은 수십 년 전부터 ROIC, 자기자본이익률(ROE), WACC 같은 자본효율성 지표를 경영의 중심에 두어왔다. 재무 성과가 단기적으로 좋더라도 자본비용을 이기지 못하면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검토하고, 저수익 자산을 정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영 판단이다. 반면, 한국 기업의 경우 여전히 매출 성장이나 단기 영업이익이 경영 계획의 주요 기준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미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본효율성→전략→보상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확립했다. 자본효율 중심의 사고는 경영진 보상 구조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미국 대형 상장사의 CEO 보상은 주가(Stock Price), 총주주환원율(TSR), ROIC 등 장기 성과 지표와 강하게 연동된다. 경영진이 단기 이익을 위해 무리한 결정을 내릴 유인이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장기적 기업가치 창출과 주주 신뢰 확보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즉 가치를 만들지 못하는 경영진에게 보상도 없다는 점에서 미국 기업경영의 본질은 매우 명확하다.

애플의 사례는 미국식 밸류업 전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팀 쿡 애플 CEO는 2019년 투자자 서한에서 “우리는 시간이 지나며 순현금 중립 상태가 될 계획(We plan to become net-cash neutral over time)”이라고 밝혔다. 이는 순현금(net cash)을 가능한 한 ‘0’에 맞추겠다는 의미다. 장기적으로 순부채 없이 현금과 부채의 균형을 맞출 계획이라는 이야기다. 기업이 현금을 과도하게 보유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안전해 보일 수 있으나, 자본효율성 측면에서는 분명 부담이 된다. 과잉 현금(excess cash)은 ROE와 ROIC를 저하시켜 결국 기업가치 할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애플은 이를 명확히 인식하고, 잉여 현금을 FCF 범위 내에서 자사주 매입·소각과 배당으로 일관되게 환원해왔다. 반면, 한국 기업은 불확실성을 이유로 현금을 내부에 과도하게 축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성장 투자와 주주환원이라는 두 축을 동시에 포기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애플의 전략은 이러한 관성을 정면으로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행동주의 펀드, 시장 규율의 결정적 견인력

미국 밸류업의 또 다른 핵심축은 행동주의펀드다. 비효율적 사업 정리, 기업 분할, 자사주 소각과 배당 확대 요구는 미국 시장에서는 일상적 압박 장치다. 이를 무시하는 기업은 결국 더 큰 시장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행동주의의 존재는 이사회 독립성과 전문성을 자연스럽게 강화하고, 경영진은 기업가치를 중심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2017년 P&G 주주총회에서 초박빙의 표 차이로 트라이언 파트너스가 이사회에 진입한 사례는 상징적이다. 트라이언은 단기 배당 확대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자사주 매입과 안정적 배당정책을 유지하면서 성장과 환원을 병행하는 구조를 정책적으로 설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경영권을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주주에 의해 기업가치 개선이 가능하다는 점을 시장에 입증한 사례다.

공시·내부통제 규제가 밸류업을 완성하다

2000년대 엔론, 월드컴 회계부정 이후 기업 경영진이 내부회계 관리제도를 구축하고 외부 감사인이 이에 대해 감사 의견을 표명하게 한 사베인스-옥슬리 법(SOX),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대형 금융회사에 대한 감독과 자본 규제를 강화한 도드-프랭크법(Dodd-Frank) 등 미국의 공시·내부통제 규제 역시 밸류업의 제도적 기반을 완성한다. 공시의 투명성, 내부통제의 엄격성, 보상 구조 공개는 시장 규율을 강화하며 기업가치 제고를 구조적으로 뒷받침한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별도의 밸류업 정책이 필요 없는 나라다. 시장 그 자체가 밸류업을 강제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2. 일본, 도쿄증권거래소가 밸류업 프로그램 가동

일본은 미국과 정반대 출발선에 서 있었다. 장기간 지속된 내부 유보 중심의 재무전략, 낮은 자본효율성, 만성적 주가산자산비율(PBR) 디스카운트는 시장 자율만으로는 개선되기 어려웠다. 이에 일본은 거래소가 전면에 나서는 방식을 택했다.

자본비용·주가 인식 경영의 제도화

2023년 도쿄증권거래소(TSE)는 자본비용 및 주가 의식 경영 실행 방안을 발표하며, 상장사에 자본비용과 주가를 인식한 경영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자본비용 산출과 공개, ROE·ROIC·PBR의 지속적 분석, 자본효율성 제고 전략 공시, 이사회 차원의 점검, 투자자와의 정기적 커뮤니케이션이 핵심 내용이다. 이는 일본 상장사의 절반 이상이 PBR 1.0 미만에 머물러 있는 현실을 바꾸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였다.

공시율 증가와 실행력 중심의 평가로 진화

2025년 기준 프라임 시장 기업의 90% 이상이 밸류업 공시를 제출했다. 초기에는 형식적 공시에 그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시장은 점차 실행력과 구체성을 중심으로 기업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실제 자산 재편과 자본 배분의 변화가 동반되는지가 관건이 되었다.

구조조정과 포트폴리오 재편의 가속화

이에 따라 일본 기업들은 비핵심 사업 매각, 포트폴리오 재편, ROIC 기준의 사업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의 밸류업 전략은 자본효율성뿐 아니라 지배구조, 공시, 투자자 관여까지 포괄하는 종합적 개선 프로그램으로 진화하고 있다.

소니의 배당정책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일본식 안정 모델을 잘 보여준다. 소니는 배당의 절대 규모보다 연속성과 예측 가능성을 중시하며, 잉여 현금은 성장 투자와 전략적 M&A에 우선 배분해왔다. ‘배당을 많이 주는 회사’가 아니라 ‘배당을 끊지 않는 회사’를 지향하는 모델이다. 이는 재무 안정성을 중시해온 일본 기업문화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최근 일본 자본시장에서도 자기자본비용(COE)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데, 히타치가 대표적이다. 연결이익 기준의 배당성향 도입, ROIC 기준의 저수익 사업 정리, 사업 포트폴리오 전환을 통해 글로벌 자본 배분 언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환원 정책이 경영계획 일부로 편입되며, 일본 밸류업 프로그램의 모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3. 유럽, 지속가능성과 기업가치의 결합

유럽은 미국처럼 시장 압력이 강하지 않은 데다 일본처럼 거래소가 밸류업 계획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유럽 기업들은 지속가능성과 기업가치를 결합한 형태의 독자적 밸류업 모델을 구축해왔다.

ESG 기반의 장기 ROIC 유지 전략

여러 연구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기업일수록 ROIC·PBR·PER 등 지표가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초과 성과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유럽 기업들이 단기 ROIC 개선보다 ‘지속가능한 ROIC 유지’에 방점을 두는 이유다.

유럽 기업도 구조조정과 스핀오프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유니레버는 행동주의펀드 및 주요 주주들로부터 ‘저성장 식품사업의 축소와 포트폴리오 전환’을 요구받았고, 2024~2025년 경영진 교체와 함께 실제 사업 재편에 나섰다.

지멘스 역시 2010년 이후 사업을 여러 번 재편했으며, 지멘스 헬스케어와 지멘스 에너지의 분리 상장을 진행했다. 이 같은 스핀오프를 택한 이유는 서로 다른 산업에서 발생하는 리스크, 수익 구조가 단일 기업에 섞이면 시장에서 기업가치를 할인하는 ‘복합 기업 할인’ 현상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산업별 적절한 투자와 전략의 중립성을 확보하고, ROCI 중심의 자원배분 최적화를 이루고자 했다.

유럽연합(EU)은 이사회 독립성, 보상 투명성, 기업 목적 명확화 등을 지속적으로 강화해왔다. 영국·독일을 중심으로 스튜어드십 코드 확산과 투자자의 관여도 한층 강화되고 있다. 유럽 밸류업의 힘은 규제·거버넌스·지속가능성이 만드는 장기적 안정성에 있다.

4. 밸류업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글로벌 표준’

미국은 시장이, 일본은 거래소가, 유럽은 규제가 밸류업을 이끌어왔다.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모두 같은 지점을 향한다. 바로 투명한 공시, 이사회 중심 전략, 자본비용을 이기는 ROIC·ROE, 자원배분의 일관성, 이해관계자 신뢰의 구축이다.

한국도 이제 이 흐름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배당 확대나 자사주 소각은 밸류업의 일부일 뿐이다. 중장기 전략, 지배구조 역량, 투자·회수 의사결정, 경영진 보상, 공시 체계 등 내부 인프라가 갖춰져야 시장은 한국 기업가치를 재평가할 것이다.

늦었지만, 그만큼 더 잘할 수 있다. 세계가 이미 겪어낸 밸류업의 시행착오와 성공 사례가 모두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의지와 속도, 그리고 시장과의 진정성 있는 약속이다.

조일상 KPMG 밸류업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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