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국내 최상위권 대학의 반도체 연구실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전공한 중국인 A씨. 박사 학위를 따자마자 본국으로 건너간 A씨는 독립적인 반도체 기업으로 위장한 화웨이 계열사에 취업했다. A씨는 주 7일 일하는 대가로 삼성전자의 세 배, 현지 기업의 열 배 수준 연봉을 받으며 중국 반도체 굴기의 최전선에 섰다. A씨를 가르친 교수 B씨는 “화웨이는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를 피하기 위해 중국 전역에 수십 개의 위장 계열사를 둔 것으로 안다”며 “중국 반도체산업의 발전 속도가 예상보다 빠른 이유”라고 설명했다.

◇한발 물러선 트럼프
미국 정부는 8일(현지시간) 엔비디아의 고성능 인공지능(AI) 가속기 H200의 중국 수출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반도체업계에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의 AI·반도체 굴기를 견제하기 위해선 ‘강한 규제’보다는 ‘길들이기’가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엔비디아의 최신 고성능 AI 가속기 ‘블랙웰’ 시리즈보다 떨어지는 제품의 수출을 허용해 중국의 반도체 자립 속도를 늦추고 미국 의존도를 높이려는 목적에서다.
미국 정부는 그동안 중국에 강경 모드로 일관했다. 2020년 5월 화웨이 규제를 시작한 건 도널드 트럼프 정부 1기 때다. 조 바이든 정부 시절인 2022년 7월엔 중국 대상 14나노미터(㎚·1㎚=10억분의 1m) 이하 공정용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를 시작했고, 석 달 뒤엔 최첨단 AI 가속기 공급 라인을 틀어막았다. 이후 성능을 낮춘 AI 가속기의 대중 수출이 일부 허용되긴 했지만, 트럼프 2기 들어서도 미국의 규제 강도는 점점 높아졌다.
매출의 약 15%를 차지하는 중국 사업이 막힌 엔비디아, AMD 등 미국 AI 가속기 개발사와 램리서치 등 반도체 장비 업체들은 반발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공개적으로 “수출 규제가 중국의 자립을 부추길 것”이라며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
◇中, 반도체 자립 속도
젠슨 황 CEO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중국 정부는 A씨처럼 해외에 있는 반도체 인력을 본국으로 부르고, 기술·장비 개발을 지원했다.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 등 중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과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 SMIC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등을 들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SMIC는 올 3분기 기준 파운드리 세계 3위에 올랐고, CXMT와 YMTC도 각각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 세계 5위권에 진입했다.
반도체 설계 시장에서의 성장세도 가파르다. 중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올해 중국 반도체 설계 시장 규모는 8457억3000만위안(약 176조원)으로 전년 대비 29.4%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최종 승자는 젠슨 황
미국의 전략 선회를 두고 다양한 평가가 나온다. AI 투자를 늘리고 있는 중국 빅테크로선 자국산보다 성능이 뛰어난 H200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런 이유로 미국에선 ‘중국의 AI 발전’을 부추길 것이란 우려가 크다. 미국 싱크탱크 IFP의 앨릭 스탭 공동창업자는 “이번 결정은 엄청난 자살골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종 승자는 젠슨 황 CEO란 진단도 있다. 주력인 블랙웰에 이어 내년 ‘루빈’ AI 가속기를 준비하는 엔비디아가 H200 ‘재고 떨이’에 성공할 것이란 얘기다. 한 중국 반도체 전문가는 “루빈 출시를 앞두고 H200 재고를 털 수 있게 된 젠슨 황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의 속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H200 수출 허가가 흐지부지될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황정수/강해령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