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민이 농기계를 살 때도 50%를 정부가 지원해줍니다. 그런데 제조업의 근간인 금형 업체들이 DX(디지털 전환)·AX(인공지능 전환) 인프라를 구축할 땐 지원 받기가 참 어렵습니다."
한국금형산업진흥회장을 맡고 있는 김성봉 한국정밀 대표는 지난 14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그는 "삼성과 현대차가 글로벌 기업이 된 배경엔 빠른 납기와 품질로 개발을 뒷받침한 금형 기술이 있었다"며 "지금처럼 금형이 방치되면 한국 제조업이 중국에 비해 경쟁력을 잃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정밀은 수출 비중이 전체 매출의 60%가 넘는다. 국내 대기업을 고객사로 둔 일반적인 금형업체와 다른 점이다. 2000년대 초반 광주, 전남·전북에 공장을 두고 있던 대우전자, 삼성전자, GM 등이 생산물량을 줄이거나 해외로 이전하면서 일감이 대폭 줄었다. 그는 "좁은 국내 시장에서 '제살 깎아먹기'식의 경쟁을 하는 대신 해외로 눈을 돌렸다"며 "회원사들과 함께 일본, 유럽, 미국, 러시아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동 마케팅을 펼쳤다"고 말했다.

광주 일대 금형사들과 함께 한국정밀은 일본과 미국을 파고들었다. 금형 강국인 일본은 '확인주의' 문화가 강해 제작기간이 한국보다 두 배 이상 길다. 빠른 납기와 당시만 해도 저렴한 가격 덕에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삼을 수 있었던 셈이다.
한국정밀은 일본 마쯔다, 혼다, 미쓰비시나 미국 포드, GM 등의 1차 협력사들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일본에선 히로텍(개폐 부품), 아스티아(차체 부품), 히루타공업(샤시·서스펜션), 산케이 기켄(배기시스템), NHK스프링(시트) 등이 대표적이다. 김 대표는 "지난주 일본 거래처들을 싹 돌아보고 왔다"며 "일본 자동차산업도 올해와 내년 전망이 매우 좋지 않아 금형 제품이 여전히 비싼 미국에서 수요처를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금형산업의 최대 수요처인 자동차 산업이 전기차로 전환하면서 부품수가 줄었다. 이에 따라 부품 개발에 필요한 금형 수요가 급감했다. 김 대표는 "자동차와 함께 주요 고객군이었던 가전은 이미 해외로 공장을 옮긴 지 오래"라고 말했다.
금형 산업의 과잉 공급은 한국 만의 문제는 아니다. 원가 이하로도 전세계에 금형 제품을 쏟아내고 있는 중국이 원인이다. 그는 "한국 금형의 반값으로 최소 80% 품질을 낼 수 있는 중국 업체의 잠식이 전세계적으로 진행 중"이라며 "최근엔 일본 금형업체들도 자국 자동차 산업이 침체를 겪자 저가에 금형제품을 내놓고 있다"고 전했다.

김 대표는 경직된 주 52시간 근무제가 국내 금형산업의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는 의견도 내놨다. 일감이 몰릴 때 집중적으로 일해야 한국 제조업의 강점인 '납기'와 '품질'을 유지할 수 있어서다. 도리어 주 52시간 근무제는 이런 강점을 유지할 수 없게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미래 제조업 경쟁력을 판가름할 AX와 DX의 도입 속도에서도 중국 정부와 대조를 이룬다고 비판했다. 김 대표는 “AX를 하려면 방대한 데이터가 필요한데, 중국은 정부 주도로 설계·가공 데이터를 무제한으로 수집해 기업에 제공하며 AI 기술력을 키우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한국은 고객사의 도면을 갖고 AI 학습용으로 데이터를 축적하면 영업비밀을 침해할 소지가 생긴다. 또 여러 금형기업들이 데이터를 한 데 모으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김 대표가 정부 차원에서 합법적으로 데이터를 공유하고 학습할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배경이다.
금형 소프트웨어(SW) 비용 부담도 근본적으로 중국과 차이가 난다. 그는 “중국은 설계 SW를 불법 카피해 비용 없이 쓰지만, 우리는 카피당 연간 5000만 원씩 비용을 지불한다"며 "10개만 써도 연간 5억 원이 나간다”고 말했다.

숙련공이 하던 업무를 데이터로 모아 인공지능(AI)이 학습하면 트라이아웃을 비약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게 김 대표 설명이다. 설계와 가공 데이터를 분석해 오류를 미리 잡아내고 공정을 조정하면, 숙련공의 감에 의존하던 영역을 데이터가 대체해 원가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AX 전환은 아직 30년 된 노후 장비를 대부분 쓰고 있는 개별 금형기업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라고 김 대표는 강조했다.

김 대표는 "규모가 커도 연 매출 100억원이 넘는 기업을 찾기 어려운 금형업계에선 데이터를 수집할 시스템도 갖추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고 봤다. 직원 50명 규모 금형회사가 제대로 된 DX 시스템을 갖추려면 약 10억원이 들어간다.
연 매출이 100억원인 회사도 통상 영업이익률이 5%를 넘기기 어려운 게 금형업계 현실이다. 최근 5년간은 적자를 내는 해도 많았다. 자력으로 AX나 DX 전환을 추진한다면 한 해 이익을 훌쩍 뛰어넘는 비용을 은행에서 빌려 투자해야한다는 얘기다. 매출 100억 원 미만의 영세 업체가 AX를 위해 10억 원 규모의 시스템 투자를 단행하기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다.
그는 “사람을 구하기도 어렵고 시간 규제까지 있는 상황에서, AX를 통한 자동화와 오류 감소만이 현장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디지털로 무장한다면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며 “정부가 금형의 AX를 국가 제조업 전략의 핵심으로 삼아달라”고 거듭 강조했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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