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지난 12월 5일(현지 시간)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은 미국이 ‘세계 경찰’ 역할에서 한발 물러나겠다는 선언이다. 트럼프 정부는 NSS에 “아틀라스처럼 세계 질서를 떠받치던 시대는 끝났다”고 명시하며 국익·산업·전략 요충지 중심의 현실주의로 선회했다.
NSS는 현 행정부 임기 동안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는 문서로 통상 4년 주기로 갱신된다. 이번 전략도 차기 행정부나 국제 환경 변화에 따라 다시 조정될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7개 주요 쟁점을 살펴봤다.
2기 NSS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미국은 더 이상 전 지구적 질서를 관리할 의지도, 비용을 지불할 여력도 없다는 현실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냉전 이후 미국이 제공해온 금융·무역·안보라는 공공재 체제는 장기 해외 개입, 산업 경쟁력 약화, 미·중 경쟁 심화 등으로 지속가능성이 흔들렸다.
이번 NSS는 전략적 재배치를 공식화하며 미국의 관심을 핵심 전선에 집중시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CSIS는 이를 “이념과 실질 모두에서의 전환점”이라고 평가했다. 동맹과의 관계 역시 ‘보호’에서 ‘기여 기반 파트너십’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국이 더 이상 외곽까지 관리해주지 않는다는 점은 국제질서 재편의 서막이라는 해석을 낳는다. 결국 이번 NSS는 미국이 무제한적 개입 능력을 상실했다는 선언이 아니라 역량에 맞춘 전략적 재배치를 예고한 문서다.
전후 질서를 설계한 미국이 그 틀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향후 글로벌 질서의 방향을 가르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NSS는 동맹의 정의를 사실상 다시 썼다. 미국은 더 이상 우산을 일방 제공하지 않는다. 동맹국은 방위비 증액, 억제력 강화, 항만·기지 제공, 공급망·산업 협력 등 모든 영역에서 실질 기여를 해야 한다.
엘브리지 콜비 전쟁부(국방부) 차관은 “제1 도련선 구축을 미국 혼자 할 수 없다”고 했다. 오키나와–대만–필리핀–믈라카해협으로 이어지는 제1도련선 억제망은 미국 단독이 아니라 동맹의 부담 분담 없이는 구축할 수 없다.
새로운 동맹 구조는 군사만이 아닌 비용·책임·산업·공급망을 포함하는 복합 기여 시스템이다. 미국의 전략 축소는 곧 동맹국의 역할 확대를 의미한다.
NSS는 미국 전략의 무게추를 인도·태평양으로 옮겼다. 중국의 군사력 확대, 대만해협 긴장, 반도체 공급망 경쟁, 해양 통제권 확보가 미 전략의 핵심 과제로 떠오르면서 이 지역 동맹국의 역할은 과거와 전혀 다른 수준으로 격상됐다. 미국이 글로벌 개입을 축소하는 대신 지역 동맹의 전략적 자립과 공동 억지력을 전제로 한 새 질서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콜비 차관이 강조한 것처럼 오키나와–대만–필리핀–믈라카해협으로 이어지는 제1도련선 억제는 더 이상 미국 혼자 감당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한국과 일본은 이 연합 억지의 핵심 축으로 지목됐다. 이는 단순한 동맹이 아니라 지정학적 부담의 공동 관리라는 성격을 띤다. 이는 단순 권고가 아니라 동맹국의 역할 확대와 비용 분담 의무화를 전제로 한 정책 신호다.
결과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더 이상 ‘우산 아래’ 있는 수혜국이 아니라 최전방 전략 파트너로 편입됐다. 한국에 요구될 과제는 대북 억지력 강화, 재래식·비재래식 방위력 확충, 첨단산업·방산 협력, 공급망 안보 체계 구축 등 국가역량 전반의 재정렬이다.
일본 역시 재무장, 집단안보 참여 확대, 전략 기지 제공 압력에 직면할 전망이다. “미국이 지켜주고, 아시아는 성장한다”는 냉전·포스트 냉전 공식은 효력을 잃었다. 미국이 세계 경찰 역할에서 물러나는 순간 아시아 동맹은 미국 전략의 외곽이 아니라 핵심 전선이 되었고 스스로 감당해야 할 비용과 책임은 과거와 차원이 달라졌다.

NSS는 중국을 더 이상 노골적 적대국으로 규정하지 않으면서도 실리를 앞세운 다층 압박 프레임을 공식화했다. NSS는 중국을 ‘비(非)서반구 경쟁국’으로 표현해 냉전식 대립 구도에서 한발 물러섰지만 경쟁·억제·거래가 중첩된 새로운 관리 체계를 제시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바이든 행정부의 ‘최대 도전’ 규정과 달리 이번 전략서는 경제 관계를 전면에 놓으며 ‘비간섭·주권 존중’을 언급해 중국이 반길 여지를 남겼다는 평가도 있다.
궈자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미가 협력하면 모두 이롭고 싸우면 모두 다친다”며 NSS가 제시한 산업·경제 협력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미국이 중국과 “상호 이익이 되는 경제적 관계”를 희망하며 대만 관련 표현도 완화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유화 조짐과 달리 NSS는 대만 억제망 강화, 제1도련선 전력 증강, 라틴아메리카에서 중국 영향 축소 등을 명시했다. 이에 중국이 “대만은 첫 번째 레드라인”이라고 즉각 경고한 것은 전략적 충돌의 본질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트럼프 2기 NSS는 억제와 거래를 병행하는 ‘경쟁적 공존’ 모델을 제도화한 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대만은 미 전략의 최우선 지점으로 남아 있으며 아시아 국가들은 지정학·산업·공급망 세 축에서 중첩 압력을 받게 됐다.
러시아의 비중은 오히려 축소됐다. NSS가 러시아를 길게 다루지 않은 것은 미국 전략의 무게중심이 유럽보다 서반구·대중 견제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읽힌다.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이 교착된 가운데 유럽에서는 미국의 대러 견제가 약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2기 NSS가 유럽에 보낸 메시지는 직설적이고 압박적이다. NSS는 유럽을 더 이상 가치 동맹의 동반자로 보지 않고 방위·재정·정체성까지 스스로 책임져야 할 ‘부담의 대상’으로 분류했다.
저출산, 개방적 이민, 규제 중심 정치 구조 등을 근거로 ‘문명 소멸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유럽 내부의 구조적 취약성을 정조준했다.
특히 미국이 반이민 정책을 주장하는 유럽 내 극우 정당을 지원할 수 있음을 암시한 대목은 정치적 파장을 키웠다. 이에 유럽은 즉각 반발했다. 안토니우 코스타 EU 상임의장은 “동맹은 다른 동맹의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경고했고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도 “유럽 민주주의를 미국이 구할 필요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메르츠 총리는 미군 의존으로 약화한 유럽 군대의 재건 필요성은 인정했다.
여기에 방위비 압박이 정면으로 겹친다. 피트 헤그세스 전쟁부 장관은 한국·폴란드·발트 3국의 국방비 확대 사례를 ‘모범 동맹’으로 지목하며 “미국은 이들에게 특별한 혜택을 부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반대로 “집단방위의 역할을 하지 않는 동맹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며 유럽을 향한 경고를 분명히 했다.
이미 나토는 ‘국방비 3.5%+인프라 1.5%’라는 새로운 기준을 채택해 제도적 압박이 현실화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유럽 지도부를 “약하고 정치적 올바름에 매몰됐다”고 비판하며 우크라이나 대응부터 이민 통제 실패까지 연달아 문제를 제기했다. 이는 NSS가 지적한 ‘유럽의 구조적 쇠퇴’ 진단과 정확히 맞물린다.
이번 NSS는 전통적 대서양 동맹의 틀을 사실상 해체하고 유럽을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지불하는’ 자립 블록으로 전환하도록 요구하는 전략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NSS에서 ‘북한’과 ‘비핵화’가 사라진 것은 단순한 편집이 아니라 전략 우선순위가 한반도에서 서반구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미국이 카리브해·파나마운하 등 자국 인접 지역을 먼저 정비하겠다는 기조를 재확인했다는 것이다.
미 정부는 확대 해석을 경계한다. 케빈 김 주한미국대사대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이 완전한 비핵화를 재확인했다”며 정책 변화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억제 자원이 대만·남중국해 등으로 집중되면서 북핵의 상대적 비중이 낮아질 가능성은 남는다.
중국도 최근 문건에서 ‘한반도 비핵화’ 표현을 축소하고 있다. 한국은 자주 억제력 강화, 핵·원자력 협정 대응, 공급망·산업 전략 재정비 등 다층적 과제를 동시에 떠안게 됐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단순한 군사 대응을 넘어 국가전략 전반을 재정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반길주 국립외교원 지정학연구센터장은 NSS 함의와 관련해 “한반도가 미 역내·역외 작전의 허브로 재해석될 수 있다”며 동맹 현대화 2단계 설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주한미군기지 역할 확대, 대북 공조 강화, 한국의 역외 역할 정립, 동맹 현대화 정교화가 핵심”이라고 평가했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돈로 독트린 시대 한국 전략은 ‘전진 배치 소모국’이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허브국’으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돈로 독트린’은 미국 중심 질서 유지의 부담을 동맹에 전가하는 ‘트럼프판 먼로 독트린’으로 해석된다.
전 소장은 부산·제주·동해의 군사 허브화, 이지스함·잠수함·장거리 미사일·무인전력 기반의 하이브리드 해군국 구상을 제안했다.
경제·기술 분야에서는 ‘중국+α 공급망’ 구축, HBM·파운드리·AI칩·전력망·데이터센터가 결합한 AI–국방–산업 통합 시스템을 통한 전략 기술국 전환을 주문했다. 전 소장은 “세 축이 맞물릴 때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흔들리는 약소국이 아니라 전략 플랫폼 국가로 도약할 기회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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