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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 '수집의 룰'을 깬 남자…무소유의 컬렉터를 아시나요

입력 2025-12-11 16:48   수정 2025-12-12 02:18

미술계의 ‘큰손 컬렉터’를 머릿속에 한번 떠올려보자. 일상의 공간은 그림과 조각 등으로 채워지고, 어쩌면 수장고에도 그림이 잔뜩 쌓여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자신이 선호하는 작가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커미션’ 형태로 수집하기도 한다. 소장 작품이 점점 더 늘어나면 미술관을 짓거나 명성 높은 미술관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증한다. 물론 자손 등 가족에게 상속하는 일도 포함한다. 여기까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수집가의 모습이다.

만약 전 세계 미술관들이 다 아는 소문난 수집가인데 작품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매년 수억원을 들여 작품을 의뢰한 뒤 그 과정을 함께한 미술관과 작가에게 작품의 소유권을 모두 넘긴다면? ‘수집의 룰’을 깨는 이런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후원의 새 역사를 쓰는 사람이 있다. 전 세계 60여 개 미술관과 대화하는 수집가, 네덜란드 로테르담 출신 한 네프켄스(71)의 이야기다.
생사의 고비 넘고…기자에서 수집가로
지난 10일 대만 신베이시 미술관(NTCAM)에서 만난 네프켄스는 “예술을 통해 사람들을 연결하고 대화하는 게 삶의 가장 큰 기쁨”이라며 “30대 초반 죽음이 눈앞까지 다가왔을 때 타인과 무언가를 나누는 것 이상의 행복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현재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그는 이날 벨기에 앤트워프 현대미술관(M HKA), 핀란드 헬싱키 현대미술관(KIASMA), 대만 신베이시 미술관, 한국 아트선재센터(ASJC) 등 미술관 4곳과 함께 ‘유라시아 영상 커미션’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12만달러의 후원금을 비디오 아티스트에게 지원해 4개국 미술관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네프켄스는 기자였고, 자전적 소설과 에세이 등을 펴낸 작가다. 프랑스와 미국에서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한 뒤 멕시코시티에서 11년간 라디오 특파원으로 일한 그는 여러 번 죽음의 문턱에 섰다. 멕시코에 거주하던 1987년 HIV 양성 판정을 받은 그는 당시 논란이 있었던 약물로 치료를 받아 운 좋게 두 번째 삶을 살게 됐다. 바르셀로나에서 살던 2001년 말 HIV 바이러스로 인한 뇌 감염으로 또 한 번 위기를 겪었다. 살아남았지만 먹고, 걷고, 말하고, 읽고 쓰는 법을 다시 배워야 했다. 그는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삶이 얼마나 연약한지,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깨닫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패션 디자이너, 소설가, 에이즈 관련 재단 등 다양한 분야에서 후원 활동을 하던 그는 2006년 바르셀로나에 ‘한 네프켄스 재단’을 설립하면서 비디오아트에 집중하기로 한다.

“1999년 5월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에서 스위스 미디어 아티스트 피필로티 리스트의 전시를 우연히 봤습니다. 작가가 누군지는 몰랐지만 ‘Remake of the Weekend’(주말의 리메이크)라는 제목에 이끌렸는데, 그때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빠져들었죠. 비디오아트는 글쓰기처럼 서사가 있고,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었어요. 그게 나의 첫사랑이었죠.”

비디오아트 수집을 결심했지만 그는 역설적으로 작품을 사지 않았다. 자신이 구입할 작품이 미술관과 기관에 전달되도록 1년 동안 전 세계 현대미술관과 기관을 조사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로테르담의 보이만스 반 뵈닝겐 박물관에 2001년 처음 작품 위촉을 의뢰해 5년간 매년 20만유로를 기금으로 내놨다.
“아시아 작가들과 깊은 인연”
“비디오 아티스트를 돕겠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지를 고민했어요. 박물관 큐레이터들과 작가의 창작 과정을 따라가는 대화가 정말 좋았어요. 어떤 게 결과물로 나올지 알 수 없는 모험이어서 더 즐겁죠. 저는 작가를 선정하거나 작품의 방향을 정하는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과정에 진행자이자 관찰자로 참여할 뿐입니다. 세상엔 좋은 미술관이 넘쳐나고, 멋진 아이디어를 가진 작가들은 결국 ‘돈’과 ‘보여줄 장소’가 필요하니까요.”

지금까지 그가 신작을 위촉한 곳은 전 세계 60개 이상의 기관에 달한다. 국적도, 명성도 무관하게 후원해왔다. 홍콩 M+, 도쿄 모리미술관, 싱가포르미술관, 마드리드 소피아 레이나 미술관, 마이애미 BASS뮤지엄 등과 함께 일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4개 미술관이 수년간 함께 후보를 추천하고, 대화를 이어가며 최종 후보 3명을 선발한 단계. 선발된 작가의 작품은 각 박물관에 비디오 사본으로 영구 소장된다.

그간 한 네프켄스 재단 기금을 받은 작가의 국적은 다양하다. 싱가포르 태국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과들루프 카자흐스탄…. 그중엔 한국인 작가도 여러 명 있다. 부산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 등과 함께 김희천, 전소정, 안정주, 남화연 작가에게 작품을 위촉했다.

“아시아 작가와의 인연은 길고 깊습니다. 1990년대 태국 여행을 시작으로 아시아 국가의 매력을 탐구했죠. 서양의 표현이 다소 직설적이고 개인전인 반면, 동양은 ‘행간을 읽는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들도 역사와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에 대한 고민을 아주 다양한 층위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다이내믹한 발전소(powerhouse)를 연상케 합니다. 역사적 비극들을 딛고 경제적 성장을 하면서 다른 아시아 국가에 없는 독특한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다고 할까요.”

때론 다국적 예술 기관과 일하는 것은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네프켄스는 전혀 다른 생각과 문화를 가진 기관과 개인들이 만나 온전히 새로운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믿는다고.

“무엇이 탄생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가슴을 뛰게 합니다. 존중과 신뢰, 이를 기반으로 한 심도 있는 대화가 우리 재단의 가장 큰 기반이죠. 점점 더 개인화되고, 대화가 단절되는 세상에선 이런 과정이 더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세상은 기부를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서른세 살에 마주한 죽음은 그의 인생을 뒤바꾼 자명종 시계와 같았고, 예술가를 도와 세상에 그들의 생각을 나누는 것만이 의미 있는 삶의 모양이라고 믿게 됐다. 한 네프켄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몇 초간 고민하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이 따듯했던 한 사람”(A warm-hearted person).

타이베이=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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