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끝이 먼저 알아채는 조용한 럭셔리, 로로피아나(Loro Piana). 1924년 이탈리아 북부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 이 브랜드는 한 세기 가까이 직물과 원단만 파고들었다. 비쿠냐, 캐시미어 등 당시만 해도 희소했던 원단이 로로피아나를 거쳐 ‘고급 원단의 대명사’가 됐다. 오로지 원단에 승부를 건 로로피아나 가문의 집념은 작은 가족 기업을 세계 최대 명품그룹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가 인수할 만큼 탐나는 브랜드로 키웠다.
프랑코 로로피아나(43)는 이 ‘섬유 명가’의 4세다. 직물과 원단 더미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는 그는 2018년 형 지아코모와 함께 새로운 남성 라이프스타일 럭셔리 브랜드 ‘시즈’를 창립했다. 로로피아나라는 거대한 울타리 밖으로 나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최근 시즈는 서울 삼성동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에 아시아 1호 매장을 열었다. 매장 오픈을 기념해 방한한 그는 “로로피아나 가문의 헤리티지를 이어 럭셔리와 스포츠웨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 브랜드로 도약하고 싶다”고 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로로피아나 가문으로서 특별한 유년시절을 보냈을 듯합니다.“저는 알프스산맥 아래 비엘라라는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제 가족이 대대로 섬유 트레이딩과 제조업을 해온 곳입니다. 아버지(피에르 루이지 전 로로피아나 회장)와 삼촌, 사촌들이 모두 함께 모여 살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캐시미어와 울의 공기를 맡으며 자랐죠. 로로피아나를 이끈 아버지 옆에서 자연스럽게 원단을 이해하는 감각을 익혔습니다.”
▷로로피아나가 세계적 기업이 되는 걸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습니다.
“제 할아버지(그와 이름이 같은 프랑코 로로피아나)는 비전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남들과 완전히 다른 특별한 것’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강했죠. 그래서 모두가 울만 거래하던 시절에 비쿠냐와 캐시미어 같은 새로운 원단을 들여오기 시작했습니다. 더 높은 품질의 원사와 원단을 만들기 위해 생산에 끊임없이 투자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제 아버지는 원단을 각국에 수출해 로로피아나의 세계를 확장했죠.”
▷시즈는 어떻게 창립했습니까.
“2013년 로로피아나가 LVMH에 매각된 뒤 가문의 일원으로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마치 빈 캔버스를 마주한 느낌이었죠. 수년간 헤매다가 내린 결론은 ‘제 정체성과 영혼, 비전을 온전히 담은 새로운 럭셔리 브랜드를 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로로피아나라는 이름에 안주하지 않고 온전히 제힘으로 처음부터 만들고 싶었습니다.”
“패션업계에서 스타트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고 경쟁도 매우 치열하죠. 모두가, 모든 가격대에서, 모든 소비자를 대상으로 엄청나게 많은 걸 제작합니다. 특히 럭셔리 시장에선 솔직히 말하면 ‘필수적 아이템’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건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와, 이건 정말 다르다’고 느끼는 무언가를 보여줘야 하죠.”
▷시즈는 어떻게 그 틈을 파고들었습니까.
“저는 시즈를 통해 럭셔리와 기능성 스포츠웨어 사이에 다리를 놓고 싶습니다. 두 세계는 완전히 분리돼 있죠. 럭셔리는 멋과 품질, 희소성에만 집중할 뿐 기능과 퍼포먼스는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스포츠 브랜드는 퍼포먼스는 뛰어나지만 스타일과 품질, 미적 감각은 부족하죠. 사람들이 도시에서 일할 때나, 도시를 탈출해 자연 속에 있을 때나 항상 시즈가 함께했으면 했습니다.”

▷원단에도 신경 쓰셨다고요.
“좋은 셰프가 요리할 때 좋은 재료를 먼저 찾듯, 우리는 좋은 원단을 먼저 찾습니다. 자연 속에서 기능성과 스타일을 동시에 유지하려면 원단이 특히 중요합니다. 저희는 19세기 영국군이 쓰던 원단 ‘솔라로’를 택했습니다. 자외선 차단 기술을 적용해 빛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데, 마치 원단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솔라로에 울, 코듀라, 리넨, 코튼 등 다양한 직물을 접목해 솔라로를 업그레이드했습니다. 시즈 매장의 벽, 의자, 액세서리도 솔라로로 만들었죠.”
▷브랜드의 생명은 무엇입니까.“짧은 시간에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브랜드를 많이 봤습니다.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흘러도 남아 있는 브랜드를 만들려면 단순한 비즈니스로 봐선 안 됩니다. 하나의 문화, 하나의 커뮤니티를 형성해야 헤리티지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시즈가 자연 속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 함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브랜드가 되려는 이유입니다.”
▷한국을 아시아 첫 진출지로 택했습니다.
“현대백화점에 자리 잡은 시즈 매장을 처음 본 순간 전율을 느꼈습니다. 로로피아나에 비하면 아직 어리지만 점차 성장하는 걸 보는 느낌이었죠. 저는 한국이 트렌드를 창조하는 시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엔 일본이 ‘아시아의 관문’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그 자리를 한국이 차지했다고 봅니다. 모두가 ‘한국에서 어떤 게 새롭게 유행하나’ 주목하는 시대죠. 한국에서 먼저 자리 잡아야 아시아 전역으로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어떤 브랜드로 자리 잡고 싶습니까.
“우리는 이미 브랜드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로고가 아니라 가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입니다. 옷장 속에만 고이 간직하는 게 아니라 서핑, 스키 등 가장 좋아하는 경험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럭셔리 브랜드가 되고 싶습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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