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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햇빛의 오묘한 힘 [고두현의 아침 시편]

입력 2025-12-12 01:35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
에밀리 디킨슨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 비치네.
겨울 오후-
대성당에서 들려오는 성가의
무게처럼 짓누르며-

하늘의 상처를 주는데도-
겉으로는 흉터 하나 없고,
그 뜻이 닿는 내면엔
큰 변화가 있네-

누구도 가르칠 수 없네- 아무도-
그것은 봉인된 절망-
공중으로부터 보내진
제국의 고뇌-

그것이 올 때, 풍경들은 귀 기울이며-
그림자들은- 숨을 멈추네 -
그것이 사라질 때, 마치 죽음의 모습처럼
아득함을 느끼네-

---------------------------------

에밀리 디킨슨은 시의 첫 행에서 겨울 오후의 빛이 ‘비스듬히’ 비친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왜 “대성당에서 들려오는 성가의/ 무게처럼” 짓누른다고 했을까요. 어떤 점에서 압박감을 느꼈을까요.

겨울에는 낮이 짧고 흐린 경우가 많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빛의 기울기(slant)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드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지구는 약 23.5도 기울어진 채 자전합니다. 이 기울기와 공전이 결합해 계절이 생기지요.

자전축의 기울기와 공전 궤도 덕분에 계절마다 낮의 길이와 밤의 길이, 기온, 생태계가 달라집니다. 겨울에는 북반구가 태양에서 멀어져 태양 빛이 더 낮고 짧게 비추기 때문에 낮이 짧고 밤이 길어집니다. 한마디로 태양과 지구 사이의 이 각도가 겨울의 본질이지요.

이 시를 읽은 미국 정신과 의사 노먼 로젠탈은 “단 몇 마디 단어만으로 겨울 빛의 핵심을 찌르는 능력과 통찰이 놀라울 정도로 빛나는 시”라며 감탄했습니다. 그는 계절성 정서장애(SAD)를 처음으로 정의하고, 이를 치료하기 위한 광선요법을 개발한 의사입니다.

로젠탈이 이 시를 처음 만난 순간은 한 통의 편지를 열었을 때였다고 합니다. 그 안에서 떨어져 나온 종이 한 장에 이 시가 쓰여 있었지요. 1981년, 그는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의 정신과 주니어 연구원이었고, 해마다 겨울철 우울증이 반복되는 사람들을 찾는 신문 광고에 응답한 편지 수천 통을 열어보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계절성 정서장애(SAD)는 의학적으로 규명되지 않았고, 그 개념에 대한 회의도 꽤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킨슨의 이 시가 그 편지에서 떨어졌을 때, 그는 시적 묘미뿐만 아니라 평생 연구할 주제를 확인해 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이 시를 오래 들여다본 그는 많은 우울증 환자에게 시를 읽어주며 ‘빛’의 오묘한 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가 분석한 시의 내용을 좀 더 들여다볼까요.

시인은 특정한 기울기의 빛이 “대성당에서 들려오는 성가의/ 무게”처럼 짓누르는 경험을 한 뒤, 그 빛이 “하늘의 상처”라고 표현할 만큼 엄청난 고통을 주는데 “겉으로는 흉터 하나 없고,/ 그 뜻이 닿는 내면엔/ 큰 변화가 있네”라고 표현합니다.

즉, 밖으로 드러날 상처는 없으나 내면의 결이 바뀌는 변화, 그 설명하기 어려운 내적 변조가 바로 겨울빛의 흔적이라는 것이지요.

로젠탈은 이 대목에서 우울함에 빠진 환자들이 흔히 호소하는 내용을 떠올립니다. 정서적인 문제를 겪는 사람들은 자기 고통을 보여줄 외적 징표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다리 깁스나 절단처럼 눈에 보이는 상처가 있을 때 받는 이해와 위로를 정작 자신들은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 자신도 흉터 같은 표가 없는 한 자기 고통을 충분히 인정하지 못하곤 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통념에 매이지 않고 그런 것들의 의미, 빛으로 인한 내면의 차이를 감지합니다. 디킨슨이 시를 쓰던 19세기 말에는 ‘의미(혹은 감정 반응)’가 뇌의 어디에 기록되는지 과학이 아직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쾌감=측좌핵(nucleus accumbens), 공포=편도체(amygdala) 등 특정 뇌 영역과 연관된다는 근거가 밝혀진 것은 한참 뒤였습니다.

시인은 이 숨은 고통을 빛과 연결하고, 그 고통이 각인되는 심층의 장소를 암시한 뒤 다음 연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누구도 가르칠 수 없네? 아무도”. 디킨슨이 쓰던 당시에는 계절성 정서장애를 아무도 몰랐으므로 아무도 가르칠 수 없었지요. 그러나 빛이 기분에 미치는 영향까지 섬세히 느끼는 사람, 곧 시인은 그것을 이해하고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 있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이런 분석과 함께 로젠탈은 광선요법의 창시자답게 “평소에 일상 속의 빛을 잘 활용하라”고 권합니다. 하루와 계절에 따라 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풀과 나무와 초록이 어떻게 빛을 부드럽게 하는지, 드넓은 하늘과 사막이 어떻게 빛을 강렬하게 하는지, 강·호수·바다는 어떻게 반사하는지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그의 말처럼 변하는 빛을 느끼면 매일의 생활이 더 즐겁고 극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는 또 “빛과 날씨, 물리적 환경 변화가 기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관찰해보라”고 말합니다. 음울한 날 바깥나들이가 어렵다면 실내에 밝은 빛을 더 들이는 것만으로도 활력을 북돋울 수 있다고 합니다. 반대로, 실내의 빛이 충분하더라도 운동을 곁들여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은 몸과 마음을 더욱 활기차게 한다고 합니다.

나아가 “아침의 밝은 빛으로 하루의 시동을 걸고, 저녁의 부드러운 빛으로 깊은 잠을 즐겨라”고 그는 조언합니다. 시간대별로 밝은 빛이나 어둠에 노출되면 생체 리듬이 강화된다는 얘기지요. 그는 “빛과 어둠의 타이밍에 반응하는 내부 시계가 우리 일상의 리듬을 조절해 주고, 이것이 심신의 기능에 많은 영향을 미쳐 우리를 즐겁고 활기차게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날씨가 추워도 하루 30분 이상 산책하며 자연광을 즐기면 행복 호르몬 ‘세로토닌’과 수면 호르몬 ‘멜라토닌’의 균형까지 잡아준다니, 이왕이면 겨울 오후 “비스듬히” 비치는 한 줄기 빛의 오묘함까지 귀하고 온전하게 누려 보시기 바랍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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