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벤처업계에선 주 단위로 근로시간 상한선을 묶은 현행 노동 규제가 생존에 치명적인 리스크로 작동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을 대표하는 인공지능(AI) 반도체 개발사 대표는 “칩 설계는 이를 제조해줄 글로벌 파운드리 기업과의 협업이 필수”라며 “마감 시점이 한 번 정해지면 바꿀 수도 없고, 미룰 수도 없다”고 했다. 이어 그는 “한 번 시점을 놓치면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 어렵고 이는 상용화 시점을 늦추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주 52시간 근로제가 그 자체로 리스크가 되고 있는데도 (정부가) 현실을 모른 채 제도를 강행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고 호소했다.
국내에서 해양오염물질 제거 기구를 개발하는 한 스타트업 대표도 벼랑 끝에 몰려 있다. 그는 “외부 평가나 기업 발표 일정이 3~5일 전에 갑작스럽게 통보되는 경우가 잦다”며 “능력 있는 직원을 새로 뽑기 어려운 상황에서 전 직원이 단기간에 집중하지 않으면 회사 존립 자체가 흔들린다”고 말했다. 이어 “어쩔 수 없이 출퇴근 시간을 자율에 맡기는 방식으로 납기를 맞추고 있지만 사실상 법을 위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늘 잠재적 리스크를 안고 사는 구조”라고 토로했다.
또 다른 VC 대표는 “스타트업은 극도의 효율과 타임투마켓(신제품 출시 시점)으로 경쟁하는 조직”이라며 “필요한 시점에 집중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 내놓는 결과물은 시장에서 곧바로 경쟁력을 잃는다”고 말했다. 이어 “실리콘밸리에서도 워라밸을 중시하지만 승부처에서는 야전 침대를 놓고 버틴다”며 “자본에는 국경이 없는데, 시간만 국경 안에 묶여 있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미국은 일정 급여 이상 전문직에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않고 있다. 독일은 근로시간 계정제를 통해 피크 시 초과 근로를 적립·상계하고, 일본은 고소득 전문직을 대상으로 시간 규제를 면제하되 건강 관리 의무를 부여했다.
전문가들은 노동시간 규제를 그대로 놔둔 채 벤처 생태계를 키우겠다는 정부 정책은 모순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소버린 AI’ 전략 실현을 위해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을 개발 중인 한 업계 관계자는 “컨소시엄은 대기업이 주도하긴 하지만 정부가 제공한 그래픽처리장치(GPU) 자원을 활용해 대학 연구실, 스타트업 등과 공동으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주 52시간제를 완벽하게 지키면서 2027년까지 불과 3년도 안 되는 시간에 제미나이, 챗GPT에 맞먹는 AI 모델을 개발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안정훈/고은이 기자 ajh632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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