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음악 중에서 내가 느낀 것, 내가 경험한 것을 반영하지 않은 것은 없다.”
라흐마니노프의 이 말에 따르면 그는 송년음악회에 맞춤한 작곡가 중 한 사람일 것이다. 한 해를 보낸다는 것은 열두 달 동안 각자가 경험하고 느낀 것을 돌아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이 17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송년음악회를 열었다. 홍석원이 지휘하고 피아니스트 신창용이 협연한 이 콘서트에서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과 교향곡 2번이 연주됐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은 국내외 콘서트장과 음악 전문방송의 리스트에서 인기 협주곡 최상위에 늘 이름을 올리는 작품이다. 교향곡 2번은 이달 4일 다니엘 하딩 지휘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가 메인곡으로 연주한 작품이다. 인기곡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고, 그만큼이나 비교의 운명을 피하기는 어렵다. 악단으로서도 단단히 마음먹고 임하는 도전이었을 것이다.
많은 음악작품이 그렇지만, 이 협주곡에서 라흐마니노프는 특정의 악기들에 더 많은 역할을 부여했다. 호른 플루트 오보에의 솔로, 바이올린 파트의 섬세한 합주력이 아름다운 노래를 펼칠 수 있다면, 그리고 이 파트들과 피아노가 원활한 대화를 펼칠 수 있다면 절반의 성공은 보장될 것이다.
이 점에서 이날 연주는 절반을 넘어 완성에 가까운 성공이었다. 라흐마니노프가 많은 억양을 부여한 민감한 호른 솔로들을 자크 들르플랑크 호른 수석은 능숙한 표정으로 소화했다. 1악장의 오보에 솔로, 2악장의 플루트 솔로도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센티멘털리즘을 뚜렷이 부각했다.
현악 특히 바이올린 파트의 세련된 컬러도 주목할 만했다. 콘서트 후반부에서는 색감을 살짝 바꿨지만, 전반부의 협주곡에서 현악은 가볍고 밝은 세련된 질감을 선보였다. 2악장 후반부에서 피아노의 분산화음 위에 바이올린이 멜로디를 노래하는 부분의 정교한 밸런스는 오래 잊히지 않을 듯했다.

이날 신창용은 자신을 전면으로 내세우는데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했다. 라흐마니노프가 요구한 온갖 난기교를 그는 능숙하게 소화했지만 브라부라(화려한 기교)를 과시하기보다는 악단과 잘 섞이는데 훨씬 신경을 썼다. 피아노 솔로와 호른 및 목관 솔로, 바이올린 파트가 지휘봉 끝에 꽉 매달려 악보가 요구하는 컬러를 받아내니 무적일 수밖에 없다. 이 곡을 더 화려하게 소화한 연주는 많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라면 이날 연주에서 신창용과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이 나타낸 컬러에 고개를 끄덕거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앙코르로 신창용은 리스트 ‘사랑의 꿈 3번’을 들려주었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의 2악장에서 들려준 폭넓고 유장한 분산화음이 다시 한 번 펼쳐졌다.
후반부의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은 1악장부터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이 서로 많은 대화를 펼치는 작품이다. 때로는 대위법적으로 서로의 파트를 뒤따른다. 라흐마니노프 시대에는 두 바이올린 파트가 좌우로 펼쳐져 ‘스테레오’ 효과를 냈을 것이다. 이 교향곡에선 그렇게 배치했으면 어땠을까. 물론 두 바이올린 파트가 가까이 있으면 더 긴밀하게 서로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정답은 없다.
2부의 교향곡에서 현악부, 특히 바이올린 파트의 컬러는 한층 더 짙은 색상의 슬라브 감성으로 변했다. 1악장의 질풍처럼 몰아치는 악구들이 효과적인 질감으로 표현됐다. 2악장에서 장재혁 클라리넷 수석은 윤곽선을 현의 합주 속에 묻지 않고 뚜렷한 표정의 솔로를 선보였다. 다른 여러 연주가 ‘센티멘털’을 강조한 나머지 맥 빠진 솔로를 보이는 것과 대비되었다. 이 선율의 라인이 유독 긴 점을 고려하면 특히 좋은 설계였다.
4악장의 리드미컬한 메인 주제를 거쳐 청람색 하늘빛 같은 현의 2주제가 무대를 가득 메웠다. 지휘자 홍석원과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이 마음먹고 다듬은 현의 치밀한 컬러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종결부를 향해 달려가는 현과 팀파니의 리드미컬한 ‘바운스 바운스’는 정밀한 기계장치처럼 호흡이 맞았다. 침울한 초겨울에 환히 숨결이 트이는 거대 교향곡의 피날레였다.
객석을 빈틈없이 매운 청중의 환호에 악단과 홍석원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천둥 번개 폴카’로 화답했다. 통상 빈 신년음악회에서 듣는 연주보다 확연한 쾌속의 질주였다. 한 해 동안 마음 속에 뭉친 그 무엇이라도 화끈하게 풀릴 것 같은 송년 무대였다.
유윤종 음악칼럼니스트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