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소중립은 더 이상 선언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다. 에너지 전환이 산업 경쟁력과 직결되는 국면에 접어들면서 각국은 온실가스 감축과 성장전략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수소는 기후 대응 수단을 넘어 차세대 산업 질서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좌우할 핵심 에너지원으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수소가 발전·철강·화학·운송 등 전 산업 부문에서 화석연료를 대체할 핵심 수단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글로벌 컨설팅 기관들은 2050년 글로벌 수소 시장 규모가 연간 약 1조4000억 달러(약 1900조 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본다. 이미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중국 등 주요국은 수소를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규정하고 정책과 투자를 본격화하고 있다. 수소는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보완하고, 전력화가 어려운 산업 부문의 탈탄소를 가능하게 하며, 에너지 안보와 공급망 안정성 측면에서도 전략적 가치를 지닌다.
한국 수소경제 전략에 글로벌 주목
이러한 글로벌 흐름 속에서 한국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수소경제 전략을 추진해온 국가로 평가받는다. 세계 최초로 수소법을 제정하고 수소경제 로드맵을 수립했으며, 청정 수소 인증제와 수소발전 의무화제도(CHPS)를 도입해 수소 수요를 제도적으로 창출하는 기반을 구축해왔다. 이는 수소를 단순한 기술개발 대상이 아니라 시장과 투자로 연결되는 에너지원으로 육성하겠다는 정책적 방향성을 분명히 한 사례다.
특히 CHPS와 청정 수소 인증제는 발전 부문을 중심으로 초기 수요를 안정적으로 형성함으로써 민간투자의 불확실성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정책이 시장을 만들고, 시장이 다시 기업 투자와 기술개발을 촉진하는 선순환 구조가 점차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경험은 향후 글로벌 수소 시장이 본격화될 경우 한국이 경쟁 우위를 확보는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최근 국내 기업의 수소 투자 확대는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완성차, 에너지, 철강, 화학 등 다양한 산업 분야의 기업이 수소를 단기적 친환경 이미지가 아닌 중장기 사업 전략의 핵심축으로 인식하며 대규모 투자를 구체화하고 있다. 이는 수소경제가 정책 주도의 영역을 넘어 산업·시장·공급망 중심 단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그 중심에는 완성차·에너지·소재 분야를 아우르는 국내 주요 기업의 수소 밸류체인 투자와 해외 협력 확대가 있다. 특히 현대자동차그룹은 수소를 단일 기술이나 개별 사업이 아닌, 그룹 차원의 미래 성장 전략이자 글로벌 사업 포트폴리오의 핵심축으로 재정의하며 생산·저장·운송·활용 전반을 포괄하는 수소 밸류체인 구축 계획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수소전기차와 연료전지 기술을 기반으로 수요를 창출하는 한편, 발전·산업용 수소 활용과 글로벌 청정 수소 공급망 참여까지 염두에 둔 전략은 한국 기업이 수소경제의 ‘수요자’를 넘어 ‘공급망 설계자’로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투자가 국내시장에 머물지 않고 중동과 호주 등 재생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지역과의 해외 협력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지역은 대규모 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청정 수소 생산 잠재력이 높아 향후 글로벌 수소 공급망의 핵심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이러한 지역과의 협력을 통해 장기적 수소 도입 가능성을 모색하는 동시에 장거리 운송과 저장을 포함한 글로벌 공급망 구축 논의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는 한국이 수소를 단순히 수입·소비하는 국가가 아니라 글로벌 수소 시장의 구조와 규칙 형성에 관여하려는 전략적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수소, 기업 직접배출뿐 아니라 공급망 간접배출 감축 수단
기업들의 투자와 해외 협력은 ESG 관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소는 기업의 스코프 1·2(직간접배출량) 감축뿐 아니라 철강·화학 등 공급망 전반의 스코프 3(총외부배출량) 감축 수단으로도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정적 청정 수소 공급망이 구축될 경우 기업들은 규제 대응을 넘어 장기적 리스크 관리와 지속가능한 성장전략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수소경제의 확산은 한 국가의 정책만으로 완성되기 어렵다. 수소 생산지와 소비지, 기술과 자본, 기업과 금융이 국경을 넘어 연결돼야 하며, 그 중심에는 결국 시장과 기업의 역할이 자리한다. 최근 글로벌 수소 시장은 정부 주도의 로드맵 단계를 넘어 기업 투자와 공급망 경쟁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글로벌녹색성장기구(GGGI)는 정책과 시장을 연결하는 촉매 역할을 수행한다. GGGI는 53개 회원국을 기반으로 개도국과 신흥국의 제도 설계와 사업 발굴을 지원하며, 민간투자가 실제 프로젝트로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왔다. 한국인 최초로 GGGI 사무총장에 임명된 김상협 총장이 주도하는 H2G(Hydrogen to Green Growth) 이니셔티브 역시 수소를 기술 논의에 머물게 하지 않고 정부 협력과 민관 파트너십, 금융 연계를 통해 시장 중심의 실행 구조로 전환하고자 한다.
GGGI는 이러한 접근을 구체화하는 주체로, 우수한 한국의 정책 경험과 기업의 기술·투자 역량을 바탕으로 회원국의 수소 프로젝트를 발굴하고 있다. 정책과 시장, 기술과 금융을 연결하는 이러한 프로젝트 발굴 방식은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과 글로벌 수소 공급망 참여를 동시에 뒷받침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글로벌 수소경제는 이제 개념 경쟁이 아닌 실행 경쟁 단계에 접어들었다. 누가 더 빠르게 투자 결정을 내리고, 안정적 공급망을 확보하며, 시장과 금융을 결합할 수 있는지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한국이 보유한 기술력과 정책 경험, 그리고 기업의 적극적 투자와 글로벌 협력 전략이 결합되면 수소를 통한 녹색성장은 선언이 아닌 현실적 산업 전략이자 지속가능한 성장 경로로 자리 잡을 것이다.
장창선 글로벌녹색성장기구(GGGI) 수소 및 지속가능 교통 분야 총괄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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