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 하지 말라는 말이냐’는 재계의 격한 반대를 뚫고 통과된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2022년 이후에도 사고는 계속 발생하고 있다. 산업안전을 핵심 공약으로 내건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안전사고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고용노동부 장관이 산재 사망 감소 목표를 두고 “장관직을 걸겠다”고 밝힌 2025년 8월 이후에도 민간기업, 공기업 가리지 않고 산업재해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사고는 끊임없이 발생한다. 하지만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막지 못한 사고와 막으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아 발생한 사고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다만 우리 사회와 기업이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기업 ESG 평가·공시 강화, 산재 예방 효과는
2025년 7월 29일 국무회의에서 금융위원회는 산재 사망 근절 대책의 하나로 자본시장을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대통령도 “효과가 기대된다”며 화답했다. 산업재해가 발생한 기업에 대해 투자와 대출을 제한하는 등 경제적 제재를 가하면 기업들이 산재 예방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논리다.
실제로 금융위원회는 2025년 10일 1일 ‘중대재해 관련 금융리스크 관리 강화를 위한 ESG 평가 및 공시 개선’이라는 이름의 후속 조치를 발표했다. 한국거래소 수시 공시와 사업보고서 등 정기 공시에 중대재해 관련 내용을 강화해 금융기관의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하고, 금융기관이 투자 의사결정에 활용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에 중대재해 요소를 보다 강화하겠다는 내용이다. 다만 ESG 평가는 민간 영역으로 국내 ESG 민간 평가기관의 자율 규준인 ‘ESG 평가기관 가이던스’를 개정해 ESG 평가에 중대재해 관련 사안이 반영될 수 있도록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합리적 접근이다. 기업은 경제적 유인에 따라 움직인다. 사고를 예방하는 데 필요한 비용보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지불해야 하는 총비용이 더 많다면, 기업은 당연히 사고를 예방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금융위의 정책은 기존 법과 제도를 통해 사고 발생 기업에 직간접적으로 부과하던 비용에 더해, 사고 기업에 대한 자본조달 비용도 추가적으로 높이겠다는 취지다. 예방 비용과 사고 발생 시 비용 간 격차가 커질수록 기업이 사고 예방에 집중할 유인은 더욱 높아진다.
국민연금 투자 시 중대재해 반영 강화
2025년 11월에는 자본시장의 큰손인 국민연금도 움직였다. 국민연금은 세계 3위 연기금으로 약 1300조 원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으며, 국내 250개 이상 기업의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한국 자본시장의 핵심 투자자다.
국민연금은 2025년 11월 기금운용위원회를 열고, 산업안전 관련 수탁자 책임 활동 강화 방안을 의결했다. 앞으로 국민연금의 투자 의사결정에 중대재해 관련 사안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ESG 평가 체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예컨대, 기존에는 산재다발 사업장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감점했지만 앞으로는 연간 사망자 2명 이상 발생, 중대산업사고 발생, 산재 발생 은폐 및 미보고의 경우에도 감점 대상으로 확대하고 감점 폭 역시 상향할 계획이다.
사람의 목숨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 당연한 것을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 기업이 중대재해 예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게 하는 충분한 수준의 페널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번 금융위원회와 국민연금의 발표를 보며 금융기관들은 고객과 가입자의 돈을 지키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해왔는지 다시 한번 곱씹어볼 것이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연금의 “중대재해 등 산업안전에 대한 수탁자 책임 활동을 통해 기업가치와 기금 수익 제고에 기여할 수 있도록 향후 이행 과정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개선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국민연금의 조치는 충분한가
국민연금은 2018년 ‘국민연금기금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스튜어드십 코드)’을 도입하고, 2023년에는 적극적 주주 활동 대상을 선정하는 기준인 중점 관리 사안에 기후변화와 산업안전을 추가했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남인순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2024년과 2025년 상반기에 산업안전과 관련한 수탁자 책임 활동을 진행한 기업은 각각 4개에 불과했고, 여전히 산업안전과 관련해 어떠한 기준으로 중점 관리 기업을 선정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번 조치는 사고 발생 기업에 대한 페널티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페널티가 높으면 예방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이다. 기업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가정하지만, 기업을 운영하는 개인은 그렇지 않다.
기업의 장기적 이익이 아닌 단기적 손익에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내 임기 동안 사고 발생 여부는 확률의 싸움이지만, 예방을 위한 비용 지출은 확정적 사안이다. 불확실한 장기적 이익보다는 단기적 비용을 아끼는 선택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국가가 존속하는 한 국민연금도 존속해야 한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이 이번에 발표한 평가 기준 개선안에는 기업이 책임성 있는 안전관리를 위한 지배구조와 시스템을 갖추고 안전에 대한 투자를 제대로 하는지 등에 대한 미래를 위한 지표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번 조치가 주주로서 직접적 활동보다는 ESG 평가라는 간접적 방법에만 집중한 것도 의구심이 남는 대목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규제를 통해 민간기업의 미래 경영 방향을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민의 돈으로 국내 1000개 이상 기업의 지분을 가진 주주인 국민연금은 그렇게 해야 한다.
공시 체계가 갖춰지기 전이라도 먼저 나서 기업에 안전 관련 정보를 요구하고, 충분치 않은 기업에는 적극적으로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 2023년 산업안전을 중점 관리 사안으로 포함한 이후에도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총 8개의 기업과 비공개 대화라는 낮은 수준의 수탁자 책임 활동만 수행했다는 것은 그동안 국민연금이 안전 이슈에 얼마나 소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국민의 생명과 노후 자금을 지켜야 하는 국민연금은 주어진 당연한 책무 이행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김태한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KoSIF)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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