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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국가 간 불신 키우는 경제안보 시대의 역설

입력 2025-12-19 17:35   수정 2025-12-20 00:16

요즘 경제안보만큼 설득력이 강하고 편리한 말도 드물다. 반도체부터 배터리, 핵심광물, 에너지까지 국가의 생존 문제가 이 단어 아래 모인다. “안보라면 어쩔 수 없다”는 공감이 먼저 작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각국이 경제안보를 강화할수록 정작 집단적 경제안보는 더 취약해진다는 것이다. 상대국의 수출 통제를 두려워할수록 국가는 산업정책과 통상 조치를 강화해야 하는 유인이 생긴다. 그 결과는 공동의 안전이 아니라 상호 불신의 확대다. 기업은 정책 판단이 언제 ‘안보’로 전환될지 예측해야 하고, 이 불확실성은 투자 지연과 비용 증가로 이어진다. 불안이 통제를 낳고, 통제가 다시 더 큰 불안을 낳는다.

사례는 이미 넘쳐난다. 첨단기술 분야 수출 통제가 강화되면 핵심광물·소재 분야에서 통제가 맞물려 돌아온다. 국가는 자국 생산을 위한 보조금 경쟁에 나서고, 상대국은 이를 통상장벽으로 인식한다. 정책은 ‘불가피한 안전조치’로 포장되지만, 시장에는 ‘예측 불가능한 위험’이 된다.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SS)은 경제안보를 핵심 축으로 공급망과 핵심소재, 통상 수단의 적극적 활용을 전면에 배치한다. 경제 수단이 더 자주 동원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면 다른 국가들도 같은 언어로 유사한 조치를 정당화한다.

국제통상규범은 자유를 원칙으로 하되 국가안보 등 예외를 둔다. 그러나 기술 경쟁과 지정학적 긴장이 일상이 되면서 예외는 비상수단이 아니라 기본 도구가 됐다. 국가는 법을 어긴다고 말하지 않고, 그 대신 예외 조항의 가장 넓은 해석을 선택한다. 법은 정책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변하고, 규범의 통제력은 약해진다.

대안은 안보 예외를 절차화하는 것이다. 경제안보 조치는 가능한 범위에서 설명돼야 하고, 필요 최소한으로 설계돼야 하며, 재검토와 종료를 전제로 해야 한다. 국제적으로도 사전 협의, 통지, 허가 기준의 명문화 같은 최소 규율이 필요하다. 통제가 불가피하다면 그 방식만큼은 상호 예측 가능하게 해야 한다.

강대국은 경제안보 조치를 ‘정책 선택지’로 운용할 여지가 크다. 시장과 기술, 동맹이라는 완충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외 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중견국의 전략은 편 서기가 아니라 규칙 만들기여야 한다. 절차의 최소 기준을 관행으로 굳히고, 다자협의에서 공급망 위기 조기경보·상호인정 같은 신뢰 구축 조치를 쌓아야 한다.

경제안보 시대는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무제한 예외를 둘 필요는 없다. 예외를 절차화하고 최소한의 규율로 ‘자제 가능한’ 다자주의적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안보를 외칠수록 불안해지는 세계에서 다자주의는 한국 같은 중견국에 설계해나가야 하는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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