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 고도화로 화학 공정이 복잡해지면서 기존의 사후적 안전 관리만으로는 사고 예방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공장 설계 단계부터 위험 요소를 과학적으로 걸러내는 ‘사전위험성 평가’를 통해 화학 사고를 근본적으로 차단한다는 방침이다.
22일 기후에너지환경부 소속기관인 화학물질안전원이 운영하는 화학물질종합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국내 화학사고는 2022년 67건에서 2023년 116건, 2024년 128건으로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2025년에는 4월까지 39건의 사고가 보고됐다. 산업 발전과 함께 사용되는 화학물질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제조 공정이 복잡해짐에 따라 위험성도 커졌다.
유해화학물질을 새로 취급하는 공정 도입은 새로운 위험 요인도 만든다. 공정 설계 전 안전성 평가를 거치지만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설비의 세부 사항이 확정된 시점부터는 대폭 변경이나 추가 조치가 어렵고, 공장이 가동된 이후엔 안전 대책을 새로 마련하기 쉽지 않다.
화학물질안전원에 따르면 한 화학기업은 초기 시범 생산 단계에서 반응기(화학 반응 등 공정이 일어나는 밀폐용기)를 500리터 짜리로 활용했다. 이후 양산 과정에선 5000리터 반응기를 썼고, 결국 사고가 발생했다. 반응기 용량에 따라 냉각 설계가 달라져야 하는데, 냉각·온도 제어 능력을 제대로 검증하지 못한 것이다.
화학물질안전원은 이러한 위험을 근본적으로 예방하기 위해 ‘사전위험성 평가’를 벌인다. 산업 활동에 앞서 공정 설계 단계부터 유해·위험 요소를 과학적으로 식별하고 예방 대책을 수립하는 절차다. 공정과 취급 물질을 분석해 잠재적 위험 요인을 제거하거나 선제적 안전관리가 목표다. 폭발이나 화재, 누출 등 대형 사고 가능성이 있는 공정에서 미리 위험 요소를 차단할 수 있다.
평가 과정은 설계 예정인 유해화학물질 취급시설의 물질·공정 검토로 시작한다. 설비 전반에 대해 전문가 검토가 이뤄지고, 공장 설계 후 ‘화학물질관리법’상 필수 제출 서류인 화학사고예방관리계획서, 설치검사, 영업허가에 이르기까지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업은 신기술 도입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검증되지 않은 위험에 대응하고, 운영 중 사고 발생 시 비상대응계획과 안전대책을 설계부터 미리 반영할 수 있다.
새만금산업단지에 입주한 한 이차전지 기업은 해외에서 수입하던 필수 첨가제인 클로로 에틸렌 카보네이트(CEC)의 국산화를 추진하며 공장을 건설했다. 그러나 테스트 가동 일주일 만에 선행 공정 배관이 파열돼 염소가스가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재가동을 시도했으나 한 달 만에 2차 사고가 터졌다. 사고 원인은 배관 설계와 원료 정제에 대한 계산 오류로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지역사회에서 신규 공정에 대한 안전 우려가 크게 불거졌고, 대규모 투자 손실로 이어졌다. 전문가들은 사전위험성평가를 받았더라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화학물질안전원은 이후 군산시, 새만금개발청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산단 입주 기업을 대상으로 안전성을 검증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신창현 기후부 화학물질안전원 사고예방심사2과장은 “사전위험성평가는 기업으로서도 경영 안전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지역사회의 신뢰를 높이는 주요 전략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화학물질안전원은 향후 사전위험성 평가를 국가첨단전략산업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 석화산업지원법 및 K-스틸법 적용 분야, RE100 기업 등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허가 기간을 2~3개월 이내로 단축하는 ‘패스트트랙’을 운영해 기업의 행정 부담을 줄여주면서도 안전성을 높이는 게 목표다. 2026년에는 용인시 반도체 클러스터 입주 기업을 대상으로 평가를 진행하기로 했다.
안전원은 전문 인력을 확보하고 기술지원 협력 사업도 확대하기로 했다. 기관 간 협력 체계를 강화해 기업의 안정적인 경영 활동을 지원할 계획이다. 박봉균 기후부 화학물질안전원장은 “화학사고 위험 요인을 사전에 파악하는 평가 제도는 공장의 안정적 운영과 산업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됐다”며 “면밀한 기술지원을 통해 산업현장에서 공정 안전을 확보하고 지역 사회의 주민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은 기자 hazz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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