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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프리즘] 기업 경쟁력이 균형발전보다 먼저다

입력 2025-12-23 17:15   수정 2025-12-24 00:41

전자업계를 취재하던 2019년 초 얘기다. 당시 최대 관심사는 120조원 규모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가 어디에 둥지를 트느냐였다. 투자 규모가 워낙 큰 데다 동반 입주를 예약한 50여 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체까지 품을 수 있는 만큼 일자리와 세금에 목마른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유치전에 뛰어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역 정치인까지 달라붙어 애원도 하고, 압박도 했지만 SK하이닉스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다들 경기 용인과 이천, 경북 구미, 충남 천안, 충북 청주시 등이 제안한 인센티브와 입지 조건 등을 따져보느라 시간이 걸리겠거니 생각했다. 지역 균형발전에 꽤나 진심이던 문재인 정부 때였던 만큼 비수도권 지자체도 승산이 있다고 기대했다.

착각이었다. SK의 선택은 처음부터 용인이었다. 그즈음 만난 SK 고위 관계자의 설명은 명쾌했다. “애초 비수도권은 리스트에 없었다. 필요한 사람을 뽑을 수가 없는데, 공장만 덩그러니 지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SK가 용인을 택한 이유는 공짜 땅도, 세제 혜택도 아닌 ‘사람’과 오랜 시간을 들여 경기 남부에 구축한 ‘반도체 인프라’였다. 일정 기간 훈련받으면 누구든 생산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일반 업종과 달리 첨단 반도체는 제조 현장에도 석·박사급 인력이 대거 들어간다. 반도체는 최대 1000개 공정 가운데 어느 하나만 꼬여도 불량이 나기 때문에 연구개발(R&D)과 제조가 ‘한 몸’처럼 움직이며 시제품 생산부터 양산 과정까지 발생하는 수많은 오류를 현장에서 즉시 바로잡아야 한다. 반도체협회 회원사의 85%가 있는 수도권을 내버려 두고, 지방에 새로운 제조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 역시 한국 반도체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게 뻔했다.

“R&D는 수도권에, 생산은 지방에”란 구호가 첨단 반도체산업에는 들어맞지 않는다는 데 동의한 당시 공무원들은 SK의 용인행(行)을 승인했다. 똑같은 이유로 2023년에는 삼성전자의 용인 시스템반도체 단지 설립 계획에도 도장을 찍었다.

6년여 전에 결론 난 사안을 꺼내 든 건 열흘 전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보고회’에서 이 문제가 다시 불거져서다. 이번엔 송전망 이슈가 더해졌다. 수도권에 송전망을 깔기 어려우니 신재생에너지 단지가 몰린 호남 등지로 눈을 돌리라는 얘기다. 그렇게 하면 반도체업계가 그토록 원하는 ‘R&D 인력에 대한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와 ‘금산분리 완화’도 일부 들어주겠다고 했다. 반도체업계는 허탈해한다. 한국을 먹여 살리는 국가전략산업이 경쟁국에 밀리지 않도록 무한 지원해도 모자랄 판에 “지방에 가야 숙원을 들어주겠다”고 몰아붙이니 말이다.

기업 유치를 이렇게 ‘공급자’ 마인드로 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SK가 용인행을 결정한 바로 그때 아마존도 제2 본사 부지를 선정했다. 한국에선 보기 힘든 ‘토너먼트 방식’이었다. 고급 일자리 5만 개를 잡기 위해 미국, 캐나다, 멕시코의 238개 도시가 최대 10조원이 넘는 인센티브를 내걸고 참전했다. 아마존은 인재 확보 가능성, 교통·통신 인프라, 각종 인센티브 등을 확인해 20개로 추린 뒤 최종적으로 미국 버지니아주 크리스털시티를 낙점했다.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다. 국가와 도시는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인프라와 인센티브로 어필할 뿐 선택은 어디까지나 기업 몫이다. 균형발전은 놓쳐선 안 될 국가 과제지만, 지금처럼 기업을 압박하는 방식이어선 곤란하다. 기업 스스로 “지방에 가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이 서도록 비수도권의 인력·교육·정주 여건부터 매력적으로 바꾸는 게 순서다. 균형발전이라는 당위성에 밀려 한국의 ‘달러박스’ 경쟁력을 우리 스스로 갉아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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