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인 전자제품 제조업체 A사는 해외 생산법인 B사를 설립하고 본사가 원천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B사 매출의 일정 비율만큼 기술 사용료를 받아야 하지만 A사는 거의 안 받다시피 했다. 이 때문에 국내로 들어왔어야 할 외화 1500억원어치가 해외에 머물렀다. 국세청 관계자는 “A사의 이익이 그만큼 줄어 소득세와 법인세를 덜 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A사 사주 일가는 2021년 이 회사가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할 때 내부 정보를 이용해 사전에 대량의 주식을 사들여 수십억원의 시세차익을 얻은 혐의도 받고 있다.
국세청은 23일 이처럼 편법으로 외화를 해외로 빼돌린 기업 11곳을 대상으로 고강도 세무조사를 벌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이 유출한 외화는 약 5000억원, 탈루한 소득은 7000억~8000억원에 달한다. 예를 들어 건설 관련 업체 C사는 100% 자회사인 미국 현지법인에 지급보증을 무상으로 제공해 국내 은행에서 거액의 외화를 차입하도록 한 뒤 차입금으로 수백억원에 달하는 미국 하와이의 18홀 규모 회원제 골프장을 인수했다.안덕수 국세청 조사국장은 “편법으로 외화를 유출해 환율 변동성을 키우는 등 경제 불안정성을 확대하는 다양한 시장 교란 행위가 발생하고 있어 엄정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외화 편법 유출 혐의를 받는 기업 외에 할당 관세 편법 이용, 가격 담합, 슈링크플레이션(용량 꼼수) 등으로 물가를 불안하게 한 기업 20곳도 세무조사를 받는다. 이번에 세무조사 대상에 포함된 총 31개 기업이 편법으로 올린 소득은 1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국세청은 파악했다.
외환시장에서는 이날 발표를 정부와 한국은행에 이어 국세청까지 환율 잡기에 나선 것으로 해석했다. 외환 부당 유출 기업을 본보기로 삼아 기업들의 달러 수요를 잠재우려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정부는 수출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원화로 환전하도록 유인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형일 기재부 1차관에 이어 지난 19일에는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도 주요 7개 대기업 고위 관계자를 소집했다.
한국은행은 달러 자산을 국내로 들여와 한은에 초과 지급준비금을 예치하는 금융회사에 미국 중앙은행 기준금리만큼의 이자를 지급하는 ‘외화지준 부리’ 제도를 내년 1월부터 6월까지 한시적으로 도입하기로 했다. 기재부도 금융회사가 외화부채의 일부를 한은에 예치해야 하는 ‘외환건전성부담금’을 내년 6월까지 면제하기로 했다.
국세청의 세무조사 압박까지 가세하자 기업들은 부담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한·미 금리차, 엔화 약세 같은 고환율의 구조적인 문제는 놔둔 채 개별 기업의 민감한 경영 판단 영역인 외환 운용에까지 정부가 개입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총력전에도 불구하고 환율은 1400원대 후반에서 요지부동이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3원50전 오른 1483원60전에 주간거래를 마쳤다.
정영효/김익환 기자 hugh@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