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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철의 자본시장 직설] 정치 문턱에 선 회계기준원

입력 2025-12-23 17:21   수정 2025-12-25 08:59

지난 19일 한국회계기준원 회원총회를 앞두고 몇몇 회원사에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는 금융감독원 쪽 인사였다. “지지 후보를 바꾸는 게 어떻겠느냐”는 취지의 전화였다. 새로운 회계기준원장 선임 표결을 몇시간 앞두고도 전화가 울렸다.

회계기준원 원장추천위원회(위원장 정은보)는 앞선 11일 지원자 면접을 실시하고 한종수 이화여대 교수를 1순위, 곽병진 KAIST 교수를 2순위로 선정했다. 회원총회에선 1순위인 한 교수 선임을 의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금감원 개입으로 결과는 뒤집혔다. 총회 표결 결과 2순위였던 곽 교수가 1순위였던 한 교수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표를 받아 신임 원장에 선임됐다.

이번 회계기준원 사태는 단순한 인사 잡음이 아니다. 원장 선임 과정에서 외부 영향력이 작동했다는 의혹은 회계기준원의 중립성과 독립성 자체를 흔든다. 회계기준원이 정치적 논쟁의 한복판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회계기준 신뢰 전제조건 '중립성'
회계기준원은 1999년 설립 이후 기업회계 기준의 제정과 개정·유권해석을 맡아온 민간 독립기구다. 상장사와 금융회사, 보험사, 비상장기업까지 광범위한 회계 기준에 영향을 미친다. 회계기준원이 시장의 신뢰를 얻어온 이유는 명확하다. 특정 기업이나 산업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국제 기준과 기술적 논리에 따라 판단해 왔다는 전제다. 이번 원장 선임 과정에서 이런 전제가 크게 흔들린 것이다.

불씨는 이미 있었다. 이한상 회계기준원장은 올해 보험업권 회계 문제를 제기하며 전면에 나섰다. 회계기준원이 특정 기업의 회계 처리에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회계 처리의 적정성과는 별개로 “특정 기업을 정조준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뒤따랐다.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단체가 회계기준원에 힘을 더하면서 논란은 확산됐다. 참여연대 출신 변호사인 이찬진 금감원장도 삼성생명 회계 논란을 정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일탈’ ‘정상화’ 같은 표현은 회계기준의 언어라기보다 정치 언어에 가까웠다.

1순위 후보를 끌어내리는 과정도 지나치게 정치적이었다. 시민단체와 언론 매체는 특정 후보들을 ‘친기업’ 또는 ‘윤석열·김건희 라인’으로 규정하며 공세를 이어왔다. 한 교수가 1순위 후보로 선정된 뒤에는 추천인까지 언급하며 특정 정치 집단과 연결 짓고, 정치적 성향까지 추측하는 무리수를 뒀다. 이 과정에서 원장 후보 제출 서류가 외부에 유출됐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며 선거 관리가 도마 위에 올랐다. 회계법인 관계자는 “회계기준은 정책 판단이 아니라 기술적 기준”이라며 “학문적 견해를 정치적 성향 논쟁으로 몰아가는 순간 회계기준원의 권위는 무너진다”고 말했다. 한 회계학 교수도 “원장 선임 절차가 이념 검증의 대상이 되고 누군가의 입김에 좌우되면 결국 기준 해석도 누군가의 입맛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게 된다”고 지적했다.
정치 언어가 숫자를 덮을 때
한 교수는 전문성을 인정받아 1순위로 선정되고도 낙마한 뒤 의혹을 밝혀달라며 입장문을 냈다. 정작 외부 개입 의혹의 중심에 선 금감원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침묵은 오히려 의문을 키우고 있다.

회계기준은 숫자의 언어이자 국제 공용어다. 정치적 수사나 정책적 선호와 무관하다. 국제적 합의와 기술적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 그 기준이 흔들리는 순간 시장은 규칙이 아니라 눈치를 보게 된다.

회계가 정치에 악용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사태는 금감원이 정권 교체 이후 감리 결과를 뒤집으면서 벌어졌다. 결국 대법원 무죄 확정까지 10년이 걸렸다. 기업과 투자자, 자본시장이 치른 비용은 셀 수 없다.

회계기준은 정치적 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회계기준이 정치로부터 독립될 때만 회계는 시장의 언어로 남을 수 있다. 회계기준원의 권위는 제도가 아니라 신뢰에서 나온다. 그 신뢰가 흔들리는 순간 회계는 숫자가 아니라 정치의 언어로 전락한다.

회계 영역뿐만이 아니다. 다른 전문·기술 영역에서도 시민단체나 감독당국을 앞세워 비슷한 인사 개입이 반복될 것이란 우려가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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