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예수정이 연극 '태풍'에 참여하기로 한 이유는 더없이 간명했다. "셰익스피어는 대단한 희곡 작가잖아요. 이 작품은 작가가 말년에 쓴 것이라 그런지 단어 하나하나가 깊고 귀해요. 한 번에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요."

예수정은 데뷔 50년 차를 바라보고 있는 배우다. 1979년 연극 '고독이란 이름의 여인'으로 데뷔해 '도둑들', '부산행', '신과함께: 죄와 벌' 등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에 출연해 대중에게도 익숙한 얼굴이 됐다. 올해도 존엄사를 다룬 연극 '고트', 무전취식 3인방을 통해 노년의 삶을 비춘 독립영화 '사람과 고기' 등에서 쉼 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오랜 공력에도 그의 연기는 설렁설렁 넘어가는 법이 없다. 단어마다 의미를 붙들고 곱씹으며 작품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서려 한다. "연극인은 말하는 시인"이라는 신념을 연기에 새겨온 그를 최근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났다.
'태풍'은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희곡으로 알려진 '템페스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동생 안토니오와 나폴리 왕 알론조의 음모로 쫓겨난 밀라노 공작 '프로스페로'를 여성 캐릭터 '프로스페라'로 바꿔 예수정이 연기한다. 알론조 역시 여성 인물인 '알론자'로 새롭게 태어났다. "요즘 성별을 바꾼 작품이 많지만 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늘 부러워했는데 그 기회가 와서 너무 좋았어요."
작품의 핵심은 '용서'다. 무인도에서 마법을 익힌 프로스페라는 안토니오와 알론조에게 복수하는 대신 용서와 화해를 택한다. "평생 이성에 의지해 인생을 살려고 노력하는 인물이에요. 순간순간 울컥하기도 하지만 내면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죠."

일부 관객은 프로스페라가 감정의 큰 변화 없이 너무 쉽게 용서에 이른 것 아니냐고 묻는다. 예수정은 그런 반응을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그가 살아온 시간을 떠올리면 용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자연 속에서 오래 산 사람들을 보면 먹는 문제로는 다퉈도, 정말 큰 문제 앞에서는 비교적 쉽게 결론을 내리잖아요. 프로스페라도 마찬가지예요. 무인도에서 12년을 보냈어요. 야생동물과 더불어 살고, 무한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내일을 바라본 시간이 많았을 테죠. '저들이 뉘우친다면 진심으로 용서해야겠다'는 온유한 마음이 그래서 가능했다고 봐요. 내 딸을 페르디낭(알론자의 아들)과 결혼시켜 호강시켜야겠다는 강렬한 욕망도 있었을 거고요."
"어머니 뼈는 산호, 눈은 진주로 변하네." 이번 작품에서 예수정이 특히 아끼는 대사는 시의 한 구절을 닮았다. 어머니 알론자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믿는 페르디낭을 위해, 프로스페라가 자신의 정령 에어리얼을 통해 위로를 건네는 대목이다. "관객들이 이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어머니를 떠나보낸 순간에 문득 떠올리게 되는 거죠. '우리 엄마의 뼈는 산호가 될 거야. 눈은 살아계셨을 때보다 더 아름다운 진주로 빛날 거야'라고요. 뜻이 바로 읽히진 않지만 문신처럼 남아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 이게 바로 연극이 주는 묘미라고 생각해요."

이렇듯 예수정은 대사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며 발화하는 배우다. "독일어에서 표준어를 뜻하는 말이 무대(Buhne)와 언어(Sprache)를 합친 '뷔넨슈프라헤(Buhnensprache)'예요. 그만큼 '무대의 언어'는 굉장한 힘을 갖고 있죠. 그래서 배우는 스스로 단속하며 무대에서 입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존중감을 가지고, 그 뜻을 제대로 해석하면서 체화시키고 싶은 욕심이 늘 있어요."
예수정이 독일어로 예시를 든 것은 그가 독일어 능통자라서다. 고려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같은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1983년부터 8년간 독일에서 지냈다. 뮌헨루트비히막시밀리안대 대학원에서 연극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극계에는 예수정을 비롯해 현역으로 활동하는 원로 배우들이 많다. 수십년간 무대를 누빌 수 있었던 에너지의 원천을 그에게 물었다. "무대에 서면 관객에게서 무한한 감동을 받아요. 자신의 모든 감각을 우리에게 열어놨다는 것 자체가 공감의 시작이잖아요. 어떠한 거리낌 없이, 관객과 삶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진정으로 공유할 수 있는 순간이 너무 행복해요. 가장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똑같죠."
허세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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