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초록색 병들이 있다. 비슷한 크기와 형태를 지닌 채 일정한 간격으로 화면을 채웠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어느 하나도 동일하지 않다. 붓질의 밀도는 제각각이고 윤곽은 흔들린다. 이것을 병이라 할 수 있을까. 정수진의 ‘부도위도 I’에서 병은 더 이상 음료를 담는 사물이 아니다. 인식의 대상이 되고 병이라는 의미에 도달하기 직전의 사고 단위에 가깝다.
서울 대치동 S2A에서 열리고 있는 정수진 개인전 ‘부도위도(不圖?圖)’는 ‘본다’라는 시각예술의 가장 중요한 감각을 어긋 내는 전시다. 눈에 보이는 형상을 따라가는 대신, 인식의 틈과 의식 구조를 더듬는 신작 유화 18점을 내놨기 때문이다. ‘그리지 않는 것을 그린다’ 내지는 ‘그리지 않음으로써 그린다’로 풀이될 수 있는 부도위도라는 나름의 이론적 사유를 정리한 자리다.
정수진은 정물을 그렸지만, 사물의 재현(再現)이라는 구상의 오랜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자신만의 색형(色形) 체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의식의 구조를 가시화한다. 사물의 외형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 사물을 바라볼 때 생기는 보이지 않는 감정, 리듬 따위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그의 회화는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구체적인 세계인 ‘현실계’와 그 현실을 바라보는 무수한 시선이 교차하는 ‘형상계’가 구분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전시장에 걸린 ‘극미와 극대 사이의 붓질이 만든 정물화’ ‘빈칸 채우기’ 같은 작품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강희경 S2A 디렉터는 “정수진이 말하는 형상계는 감정이 잠시 머무는 장소이자 사물과 인간 의식이 얽힌 그물망”이라며 “그림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을 통과해 자신 안의 의식을 마주하게 된다”고 말했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정수진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타이베이현대미술관 등 국내외 주요 기관 전시에 참여하며 이름을 알려왔다. 이번 전시는 지난 9월 프리즈 서울에서 솔로 부스로 작품을 선보여 주목받은 직후 열리는 전시란 점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전시는 다음 달 10일까지.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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