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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R.I.P]"스타 아닌 장르로 남겠다"...불멸의 전설 된 예술가들

입력 2025-12-26 16:36   수정 2025-12-26 17:19



“인생은 말이 되지 않는다(Life doesn’t make sense).”

세상에서 가장 기괴한 영화를 만들어 ‘오컬트의 제왕’으로 불린 데이비드 린치 감독(1946~2025)이 자주 하던 말이다. 그것은 예술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였다. 인생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모든 인과관계가 명확하다면 태초에 예술이라는 게 존재했을까. 린치의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잊으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일상 속에서 낯선 것과 기이한 것들을 기꺼이 낚아 올리라는 메시지였다. 글과 그림이, 영화와 연극과 문학이 왜 세월을 거슬러 영원히 살아남는지에 대한 해답이었다.

올해도 수많은 예술가가 세상을 떠났다. 공백과 혼돈이 뒤엉킨 세상, 그 속에서 사유와 울림을 줬던 이들이다. 2025년의 끝자락, 우리가 떠나보낸 위대한 별들이 남긴 이야기를 다시 읽는다. 그들은 싸웠다. “문학은 영구적인 반란의 형태”라고 말한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거장 마리오 바르가스요사, “시시포스처럼, 평생 불가능한 문학의 꿈을 꿨다”던 소설가 서정인, 그리고 “과거를 배우되 결코 머무르지 말라”며 기존 건축계의 문법에 끊임없이 도전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

이들의 영혼엔 규칙을 깨는 단단한 용기가 숨어 있었다. “다 이상한데,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개념”이라던 배우 다이앤 키튼, “(여배우는) 일류가 돼야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어진다”고 한 배우 김지미. 뉴 할리우드 시네마의 상징이자 영화계를 위해 헌신한 로버트 레드퍼드는 아예 이런 말을 남겼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위험이다”라고.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우리가 영원히 가슴에 품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이다.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하는 건 오직 남아 있는 자들의 몫이 아니던가. 그들의 삶을 글로서 다시 읽는 건, 죽음이라는 단어에 마침표 대신 쉼표를 다는 일이다.

1년간 우리가 떠나보낸 예술가들의 이야기는 아르떼 홈페이지에서도 영상과 함께 다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 다 담지 못한 하늘의 별이 된 수많은 스타에게, 당신 곁을 떠나간 모든 사랑했던 이들에게 전한다. RIP(Rest In Peace).



클래식·공연계

“음악이 죽음과 절망을 밀어냈다. 전쟁통에 발가락 잃고, 피아노 얻었다.”

피아니스트 정진우
1928.1.8~2025.1.26

한국 클래식 음악계 거목인 피아니스트 정진우는 1928년 평양에서 태어나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의사의 길을 걸었다. 1946년 일가족과 월남한 그는 다섯 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쳤지만 부모님은 직업으로서 음악가는 허락하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레지던트 생활을 하던 그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11월 군의관으로 입대했다. 이듬해 1월 강원도 성지봉에서 부대 전체가 중공군과 맞닥뜨렸고, 패주 도중 군화를 잃고 눈송이를 먹으며 버티던 그는 양쪽 발에 심각한 동상을 입었다. 양쪽 발가락과 발등 일부를 도려내야 했다.

1952년 11월 15일 피란지인 부산의 이화여대 강당에서 스물 넷의 정진우는 불편한 걸음걸이로 무대에 올라 첫 독주회를 열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과 쇼팽·리스트의 독주곡을 연주했고, 강당 밖에 서 있던 사람들도 박수를 보냈다고 알려진다. 전쟁통에 열린 이 공연 이후 그는 운영하던 의원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연주에 뛰어들었다. 서울대, 이화여대, 서울예고 등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연주 활동에 전념했다. 1957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떠났고 1959년 귀국 후 1993년 정년 퇴임 때까지 서울대 음대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정진우는 신수정 전 서울대 음대 학장, 김용배 전 예술의전당 사장, 김석 경희대 명예교수 등 후일 ‘정진우 사단’으로 불린 후배를 길러냈다. 월간지 <피아노음악>을 창간해 음악계의 교류 확대에도 공헌했다. 한국쇼팽협회를 세운 뒤 1990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쇼팽협회국제연맹(IFCS) 회의에 초청받아 이 단체를 IFCS에 가입시키기도 했다. 2018년 서울대 총동창신문 인터뷰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기계적으로 연주하는 것을 경계하고, 늘 노래를 먼저 들려줬다”고 했다.



“Less is more. (단순할수록 좋다)”

한스 판 마넨 Hans van Manen
1932.7.11~2025.12.17


한스 판 마넨은 발레 본질을 가장 간결한 언어로 남긴 안무가였다. 1932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무용수로 시작한 그는 안무가로 전향하며 현대 발레의 핵심적 스타일을 구축했다. 그의 작품들은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한 정제된 움직임과 음악적 구조로 인간 관계, 감정을 절제 있게 포착했다.

대표작 ‘캄머발레(Kammerballett)’는 깊이 있는 신체 언어로 발레 흐름을 바꿔놓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으로 그는 ‘춤의 몬드리안’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서울시발레단은 이 작품을 2024년 아시아 초연으로 무대에 올리며 국내 관객과 무용계에 새로운 현대 발레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그의 안무는 전 세계 주요 발레단 무대에 올랐고, 150편이 넘는 작품으로 현대무용의 현재형 언어를 제시했다. 내년 11월에는 그의 작품 세계를 집약한 트리플 빌 ‘올 포 한스 판 마넨’이 서울시발레단을 통해 무대에 오른다.



“내가 작업하는 이유는 질문하기 위해서이다.”

로버트 윌슨 Robert Wilson
1941.10.4~2025.7.31


로버트 윌슨은 장르의 경계를 허물며 현대 공연예술을 새로 정의한 ‘빛의 연금술사’였다. 1941년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나 건축과 미술을 전공한 그는 1960년대 뉴욕 전위예술계에 등장하며 무대 언어의 혁명을 이끌었다. 그는 대사 및 서사 중심의 연극 문법을 거부하고 침묵, 정지된 이미지, 빛과 리듬이 서사를 대체하는 독창적 미학을 구축했다. 1976년 작곡가 필립 글래스와 협업한 5시간의 대작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그를 세계적 거장 반열에 올렸다. “빛은 공간의 척도”라고 단언한 윌슨은 조명을 극대화해 무대를 하나의 거대한 조각품으로 탈바꿈시켰다.

연출가이자 조명 디자이너, 시각예술가로서 전방위적 행보를 보인 그는 가구 디자인과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론다니니’ 재해석 전시 등 마지막까지 창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그것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 일한다”고 했다.



“무용수는 진흙, 나는 그것을 빚는 조각가다.”

유리 그리고로비치 Yury Grigorovich
1927.1.2~2025.5.19


볼쇼이의 전설이자 발레를 재정의한 거장. 유리 그리고로비치는 20세기 발레의 거장으로 볼쇼이 발레단을 세계적 명성으로 이끈 안무가이자 예술감독이었다.

192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바가노바 발레아카데미를 졸업한 그는 무용수로 시작해 안무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1964년 볼쇼이 발레단 수석안무가로 부임한 뒤 30여 년 동안 단체를 이끌며 발레의 표현과 극적 구성을 확장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스파르타쿠스’, ‘호두까기 인형’, ‘이반 뇌제’ 등이 있다. 클래식 발레에 강렬한 서사와 역동적 군무를 접목해 발레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는 한국 발레계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국립발레단 공연에 직접 안무와 연출로 참여해 ‘스파르타쿠스’와 ‘호두까기 인형’의 무대를 함께 만들며 국내 무용수 및 관객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다. 발레를 하나의 ‘드라마’로 인식하게 만든 그의 미학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안무가들의 기준으로 남아 있다. 웅장하면서도 극적인 그리고로비치의 무용 언어는 전 세계 무대에서 여전히 빛난다.



“하루를 살아도 나답게 살고 싶다”

윤석화
1956.1.16~2025.12.19

윤석화는 ‘스타 배우’라는 개념이 전무하던 연극계에 혜성처럼 나타나 그 자체로 ‘장르’가 된 배우다. 뇌종양으로 투병하던 끝에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무대 복귀를 꿈꾼 천생 배우였다.
그는 ‘CM송의 요정’으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오란씨’ ‘부라보콘’ 등의 광고에 실린 허스키하면서도 감미로운 그의 목소리는 대중에게 깊이 각인됐다.

1957년 연극 ‘꿀맛’으로 데뷔했다. 1983년 연극 ‘신의 아그네스’에서 갓 태어난 아이를 죽인 수녀 아그네스 역을 열연하며 스타로 떠올랐다.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명성황후’ 등에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공연예술계 생태계를 위해서도 힘썼다. 1999년 경영난을 겪던 공연예술 월간지 <객석>을 인수해 2013년까지 발행인을 맡았다. 2002~2020년에는 대학로 소극장 ‘정미소’를 운영하며 후배 배우들이 마음껏 연기할 환경을 제공했다. “하루를 살아도 나답게 살다 가겠다”며 항암 치료를 거부한 그의 선택은 연극 명대사처럼 우리 마음속에 남았다.

김보라/조민선/이해원/허세민/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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