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는 무능했습니다. 그런 주제에 꿈만 컸습니다. “우리는 서로 돕고 살아야 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늘 노력할 의무가 있어.” 쫄쫄 굶는 아내와 네 명의 아이 앞에서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일종의 사이비 종교에 가까운 사회 운동, ‘생시몽주의’(Saint-Simonianism)에 푹 빠진 광신도였습니다.
급기야 아버지는 다른 광신도들과 함께 수도원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네 아이를 홀로 먹여 살리게 된 어머니의 얼굴은 점점 흙빛으로 변했습니다. 아버지는 가끔 집에 들를 때마다 말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족이라는 제도를 없애야 해.”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딸을 껴안고 절망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훗날 딸은 회상했습니다. “아버지가 인류를 구원한다는 꿈속에 사는 동안, 어머니는 가난에 질식해 죽어가고 있었다.”
결국 어머니는 서른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원인은 과로와 영양실조. 돈이 없었던 가족은 어머니의 시신을 공동묘지, 그중에서도 연고가 없는 빈민들이 묻히는 구덩이에 묻어야 했습니다. 열한 살의 딸은 그 비참한 광경을 지켜보며 다짐했습니다. 나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남자에게 자신의 삶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소녀는 훗날 프랑스 최고의 명예 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받은 최초의 여성 예술가가 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로자 보뇌르(1822~1899). 2026년 말의 해를 맞아,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말 그림’을 남긴 화가로 꼽히는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 봅니다.
이듬해인 1822년,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로자가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났습니다. 형편은 넉넉지 못했지만 집안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습니다. 아버지가 급진적 사회주의 종교인 ‘생시몽주의’에 광적으로 빠져들기 전까지는요.


생시몽주의는 “사회적인 계급을 철폐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해서 모두가 서로 돕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는 사상이자 사회 운동이었습니다. 그럴듯한 얘기였지만 실상은 사이비 종교. 신도들은 교주를 신처럼 떠받들어야 했고, 단추가 등 뒤에 달린 조끼를 입어야 했습니다. 혼자서는 절대 입을 수 없고 반드시 다른 사람이 단추를 채워줘야 입을 수 있는 이 조끼는 명목상 ‘협력의 상징’이었지만, 사실은 신도들을 의존적으로 만들어 조종하려는 교주의 계략이었습니다. 훗날 로자는 “그 바보 같은 조끼는 우리 집 가장이 가족을 버렸다는 표시일 뿐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급기야 아버지는 교주의 명령에 따라 가족을 버리고 다른 광신도들과 함께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남겨진 네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어머니는 1833년 서른여섯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이때 로자의 나이가 불과 열한 살. 장례 비용조차 없는 탓에 어머니의 시신은 다른 빈민들의 시신과 한 구덩이에 파묻혔고, 아버지는 돈이 없어 묘비도 세워주지 못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로자는 가로등 불빛에 타 죽은 나방들을 종이 상자에 모은 뒤 잘 묻어줬습니다. 결혼이라는 불꽃에 뛰어들어 타죽은 어머니를 애도하는 의미였습니다.


이때부터 로자는 ‘착한 여학생’이 되기를 거부합니다. 쉽게 말해, 비뚤어져서 막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애들과 주먹다짐을 벌이고 장난을 일삼는 건 기본. 학교를 옮길 때마다 큰 사고를 쳐서 ‘통제 불능’이라는 이유로 퇴학도 여러 번 당했습니다. 결국 로자를 받아주겠다는 학교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됐습니다. 그 때 마침 아버지가 로자 곁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있던 수도원이 정부에 의해 폐쇄됐거든요. 결국 로자는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너는 재능이 있어. 여자라고 해서 포기하면 안 된다. 남자들보다 더 훌륭한 화가가 돼야 해.”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믿었던 종교의 양성평등 사상은 로자의 자립심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다만 로자와 아버지에게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사이비종교가 약속하는 허황된 천국을 꿈꾼 몽상가. 하지만 로자는 아버지가 보지 않으려 했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진짜 세상’을 포착하기 위해, 그녀는 붓을 들고 도살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로자가 향한 19세기 파리 도살장은 여성이 들어간다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사방에 피비린내와 오물 냄새가 진동하고, 거친 남성 노동자들의 고함과 욕설이 오가는 곳이었지요. 로자가 스케치북을 들고 나타나자 그녀에게는 조롱과 위협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로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습니다. 매일같이 도살장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소와 양의 근육, 뼈, 내장을 정밀하게 기록했지요. 피와 뼛조각이 튀는 현장에서 묵묵히 그림을 그리는 로자의 집념에 결국 인부들도 항복했습니다. 나중에는 인부들이 스케치하기 좋은 부위를 골라 먼저 보여주기까지 했습니다.



작업에 몰두하다 보니 여성복의 긴 치마와 꽉 조이는 코르셋이 거추장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로자는 큰 결심을 합니다. 바지를 입는 것이었습니다. 입고 싶으면 언제든 옷장에서 바지를 꺼내 입으면 되는 지금과 달리, 당시 프랑스는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바지를 입는 걸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바지는 공적 공간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남성의 특권’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로자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습니다. 파리 경찰청에 정식으로 신청해 ‘남장 허가서’를 받아낸 것이었지요.
덕분에 로자는 말들을 사고파는 거친 마(馬) 시장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말의 뒷다리 근육이 힘을 쓸 때 어떻게 뒤틀리는지, 숨을 몰아쉴 때 콧구멍이 어떻게 벌어지는지를 자세히 관찰했습니다. 수만 번의 스케치를 통해 쌓아 올린 ‘빅 데이터’ 덕분에 로자는 압도적인 정확성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불과 열아홉 살 때 발표한 토끼와 염소 그림이 큰 주목을 받으며 그녀는 단숨에 유명인이 됩니다. 그리고 1849년, 20대 후반의 나이에 발표한 ‘니베르네의 쟁기질’로 그녀의 이름은 파리 미술계에 울려 퍼집니다. 겨울이 오기 전 가을맞이 밭갈이를 하는 두 쌍의 소를 그린 거대한 캔버스. 빛을 받아 하얗고 붉게 빛나는 소들의 털, 무거운 쟁기를 끄는 위풍당당한 그 모습은 보는 사람을 압도했습니다. 평론가들은 “남성 화가들을 압도하는 생동감 넘치는 걸작”이라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가로 5m, 세로 2.5m에 달하는 거대한 그림을 그리는 건 남자에게도 쉽지 않은 육체노동이었습니다. 로자는 이 거대한 캔버스를 채우기 위해 18개월 동안 사다리를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붓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때까지 그녀가 도살장과 마시장에서 익힌 해부학적 지식이 총동원됐습니다. 그녀가 붓을 움직일 때마다 말의 터질 듯한 근육,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친 숨결, 바람에 흩날리는 갈기가 캔버스에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결과는 ‘대박’이었습니다. 4만프랑, 지금 한국 돈으로 15억원에 가까운 거금에 작품이 팔려나갔습니다. 로자는 단숨에 세계 미술시장의 슈퍼스타가 됐습니다. 영국과 미국에서도 그녀의 이름은 화제가 됐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로자를 직접 성으로 초대해 경의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로자는 퐁텐블로 숲 근처의 성(城)을 하나 사들였습니다. 그곳에 그녀는 거대한 아틀리에를 짓고 자신이 사랑하는 동물들을 모았습니다. 그녀는 암사자와 수사자를 직접 사서 길렀는데,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이 사자들은 로자의 앞에서 온순한 강아지처럼 굴었다고 전해집니다. 정원에는 원숭이, 가젤, 양, 말들도 자유롭게 뛰어놀았습니다. 로자는 이곳에서 동료, 조수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던 1865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방문객에 성 전체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인 유제니 황후가 성에 방문한 겁니다. 유제니 황후는 로자를 만나 말했습니다. “원래는 황제가 줘야 하지만, 꼭 제가 주고 싶어서 고집을 부렸어요.” 그리고는 로자의 가슴에 프랑스 최고의 명예인 레지옹 도뇌르 십자가 훈장을 달아줬습니다. “남성만 천재가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천재라는 단어에는 성별이 없다는 사실을 당신이 세상에 알려줬어요.” 여성 예술가로서 이 훈장을 받은 건 로자가 처음이었습니다.


로자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예술은 모든 것을 흡수하는 폭군(Tyrant)이다. 몸과 마음, 영혼의 모든 것을 바쳐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 말대로 그녀는 수만 번의 스케치를 반복했고,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기도 했습니다. 입으로만 구원을 외쳤던 아버지와 달리, 로자는 피와 오물이 튀는 도살장에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덕분에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자신만의 성(城)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눈앞의 현실이 거칠고 혼란스러울지라도, 결국 현실을 개척하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 로자와 그녀의 그림 속 말처럼 현실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도약하시기를. 머나먼 천국을 꿈꾸더라도, 주변의 소중한 것들까지 아끼며 돌아볼 수 있는 한 해 보내시길 바랍니다.


<i>**이번 기사는 Catherine Hewitt의 'Art is a Tyrant: The Unconventional Life of Rosa Bonheur', Dore Ashton의 'Rosa Bonheur: A Life and a Legend', Anna Elizabeth Klumpke의 'Rosa Bonheur: The Artist's (Auto)biography'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4권 출간 준비를 위해 연재를 한 주 쉬어갑니다. 오는 3월 출간 예정입니다. 1월 17일에 다시 칼럼으로 찾아뵙겠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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