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자가 회사 자료를 들고 나갔어요." "거래처가 통째로 넘어갔어요." "바로 옆에 경쟁사가 생겼어요." 사업장 간 인력 이동이 보편화되고 창업 물결이 거세지면서 사업주들이 이 같은 불만을 쏟아내며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사업주 곁을 떠난 이들이 사업 관련 정보나 고객들을 빼돌리는 사례가 늘자 이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해서다. 지난해 11월 대구지법에서 선고된 1심 판결이 대표적 사례다. 국내산 육우 가공·유통업체에서 일하던 팀장 A씨는 퇴사 이후 육류 도소매업체를 설립했다. 기존 업체에서 일하던 직원 2명도 퇴사한 뒤 A씨 업체로 옮겼다.
기존 업체는 A씨가 경쟁사를 설립한 이후 매출이 감소했다고 주장했다. A씨가 재직 당시 자사 영업비밀인 거래처 목록을 엑셀 파일로 변환한 다음 이를 빼돌렸다는 것이다. 이 업체는 A씨가 거래처들에 접촉해 영업을 하면서 매출이 줄었다면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법원은 회사 정보의 '법적 성격'을 중요하게 본다. 비공지성, 경제적 가치, 비밀관리성 등이 영업비밀을 구성하는 주요 요인이라는 것이 법원의 입장이다.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비밀로 관리되는 정보여야 한다는 의미다.
법원은 거래처 목록이 이 같은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영업비밀로 볼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A씨를 포함한 퇴사자들이 영업을 하는 과정에서 거래처 목록을 자연스럽게 취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육우 단가표도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부위별·등급별 단가가 공개된 자료인 만큼 독립된 경제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이다.
지난해 11월 수원지법에서 선고됐던 연구개발 담당자 사건에서도 정보의 법적 성격이 쟁점으로 다뤄졌다. 한 회사 연구개발 담당자였던 B씨는 자사 접착제 원료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를 회사에 알리지 않았다. B씨는 배우자 명의로 사업자등록을 한 뒤 자신의 회사에 국산화한 원료를 판매했다.
회사는 직접 생산했을 경우 약 2억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고 B씨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원은 "최종 접착제의 품질과 성능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회사의 해당 제품에 대한 특허권 등이나 전용실시권이 인정되지 않는 이상 B씨의 행위로 인해 회사가 손해를 입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이 과정에선 직무발명에 관한 법리가 다뤄졌는데 법원은 국산화 원료 발명을 '직무발명'으로 볼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또 육우업체 사건과 마찬가지로 회사 영업비밀이 저장된 외장하드를 가져간 행위만으로 B씨가 어떤 이익을 취득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고 못 박기도 했다.
기존 학원은 C씨가 영업비밀인 학교 중간·기말고사 기출문제와 학생·학부모 연락처를 빼돌렸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이 사건에선 경업금지도 쟁점이 됐는데 퇴사 이후 3년간 학원 반경 3㎞ 이내에서 동종·유사 학원에 취업하거나 개업하는 것을 금지하기로 한 약정을 B씨가 위반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법원은 영업비밀도, 경업금지 위반도 인정하지 않았다. 기출문제는 시험이 치러진 뒤 여러 공개된 경로를 통해 입수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경업금지 위반 주장에 관해선 "학원 기준 반경 3㎞는 학원 부근 학교·주거지가 밀집된 인천 청라 지역 대부분이 포함된다"며 "경업이 금지되는 장소적 범위, 금지기간, 취업제한의 내용이 지나치게 포괄적"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판결을 종합하면 법원은 '문서 한 줄', '정황 한 장면'만으로 영업비밀 침해나 경업금지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단순히 '회사 자료'란 이유로 영업비밀에 해당한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약정이 있으니 위반'이란 근거로 경업금지 위반을 주장할 경우엔 '해당 약정이 유효한지'를 먼저 검토한다.
한 인사노무 업계 관계자는 "최근 판결들이 던진 결론은 의심보다 '관리·증거'"라며 "영업비밀일 경우 접근권한·표시·관리체계 등을 통해 '비밀관리성'을 강조할 수 있어야 하고 경업금지라면 기간·지역·직종을 좁히고 그에 따른 대가 지급을 설계해야 향후 분쟁 과정에서 손해를 입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대영 한경닷컴 기자 kd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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