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아니스트 김송현은 그가 운영하는 서울 서초구 소재 로베르트 뮤직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아르떼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은 2002년생 말띠인 그를 이렇게 기억할 법하다. 뉴욕 리스트 국제 콩쿠르 우승자이자 윤이상 국제 음악 콩쿠르의 준우승자. 193cm의 장신 피아니스트. 음악계의 거목인 백혜선과 당타이손의 제자. 그의 세 번째 말띠 해를 맞아 이젠 새 수식어로 ‘문장가 피아니스트’를 붙일 때다.
김송현이 열두 달의 흐름을 담아 12곡, 글 12편, 사진 12장을 한데 모은 앨범 <타임스케이프(Timescape)>를 지난 1일 내놨다. 피아노에만 매진하는 동료들이 가득한 나이에 주저 없이 글과 사진에 예술혼을 쏟았다. 한국 문학에서 나름의 입지를 다진 작가 목정원·임경선·이훤 등이 조언을 아끼지 않고 배우 심은경과 작곡가 이루마가 추천사를 더했을 정도. 열두 달을 여러 갈래 예술로 켜켜이 풀어낸 김송현을 찾아 그 까닭을 물었다.

하얀 모래와 푸른 바다 사이, 까만 피아노
‘타임스케이프’란 말은 사전에 없다. 본래 스케이프(scape)는 다른 단어 뒤에서만 쓰인다. 풍경을 뜻하는 랜드스케이프(landscape), 도시 경관을 뜻하는 시티스케이프(cityscape)가 그렇다. 그러니 타임스케이프를 직역하면 ‘시간의 풍경’ 정도 되겠다. 비발디와 차이콥스키의 작품에 붙었던 ‘사계’를 피한 것만으로도 소소한 파격이다. 김송현에겐 타임스케이프가 “음반에 담긴 음악들이 품고 있는 세계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었다고. 그만큼 그는 단어가 주는 인상과 의미를 숙고했다.
처음엔 열두 달로 앨범을 짤 생각은 없었다. 그가 속한 음악기획사인 뮤직앤아트컴퍼니의 김보경 대표에게 ‘비 마이 러브’를 추천받아 들은 게 시작이었다. 재즈 음악가 키스 자렛의 편곡으로 유명해진 곡이었다. “자렛이 그의 오랜 투병 생활 동안 자신을 정성 다해 돌봐준 아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녹음해서 선물했던 곡인데요. 이걸 듣고 ‘저도 제가 아끼는 곡들을 녹음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5~6곡으로 미니 앨범을 내려 했는데 구상하다 보니 트랙 수가 점점 늘더라고요. 그렇게 12곡이 됐을 땐 시간의 흐름과 음악을 연결지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이 아이디어에 꽂힌 그는 달들의 정경에 맞는 음악을 찾았다. 성탄절 서사가 담긴 ‘비 마이 러브’는 12월로 못을 박아뒀다. 발렌타인 데이를 품은 2월엔 프레드 허쉬의 ‘발렌타인’이, 꽃이 피는 4월 봄엔 멘델스존의 ‘봄노래’가 어울렸다. 장마가 찾아오는 6월엔 물결처럼 음들이 일렁이는 포레의 ‘시실리안느’를 담았다. 달에 맞추느라 아쉽게 빠진 작품도 있었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6월이나 12월에 넣음 직했지만 이미 임자가 있는 자리였다.
"인간은 달이나 년(年)으로 시간을 분절해서 인식하지만 비(非)인간은 시간의 흐름 그 자체를 받아들이잖아요." 계절이 서서히 변화하듯 곡이 바뀌는 구간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게끔 각 작품들의 조성과 휴지에도 신경을 썼다. 세월의 흐름에 변치 않을 척도로는 바다를 뒀다. 모습은 천변만화여도 존재는 변치 않는 이 거대한 자연물을 담고자 그는 강원 고성군의 바닷가에서 이번 앨범의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앨범이다 보니 이 안에 불변하는 요소로도 무언가가 같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은 그 자체론 변하지 않는 만큼 바다, 이왕이면 이름 없는 해변에서 뮤직비디오를 찍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피아노 없이 글짓기
음악 이상으로 그가 세심하게 작업했을 부분은 이 앨범에 수록된 글이다. 시, 소설, 편지글, 수필 등 장르를 넘나들며 월별로 직접 썼다. 영어 번역문도 나란히 담았다. 가령 바다를 글로 그려낸 6월의 시는 한글로나 영어로나 함축미가 넘실거린다. “처음엔 작가님 다섯 분 정도를 섭외해서 곡 2~3개를 들려드린 다음 이에 맞는 글을 부탁드리려 했어요. 그러다가 ‘여럿에게 글을 부탁하는 건 앨범의 독창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한 작가분의 조언을 듣고 제가 직접 글을 쓰게 됐죠. 피아노에 대한 얘기, 연주자로서의 시선은 가급적 담지 말자. 음악 자체가 내게 이야기해오는 감정만 적어보자. 이렇게 정해놓고 시작했어요.”

김송현은 음악에 맞춰 글의 모양을 잡았다. 3월 곡으로 음악적 간결함이 돋보이는 패르트의 ‘아리누슈카의 쾌유를 위한 변주곡’을 담을 땐 마찬가지로 간결함이 돋보이는 시를 썼다. 3시간짜리 발레에 쓰인 ‘스파르타쿠스와 프리지아의 아다지오’를 9월로 풀어낼 땐 장대함을 담기 좋은 소설 형식을 빌렸다. 문인들의 도움도 받았다. 에세이 ‘태도에 관하여’의 저자인 임경선에게선 겉멋을 뺀 문체의 힘을, 산문집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의 작가 목정원에게선 다듬어진 문장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미국 조지아 공대를 나온 시인 이훤은 한국어와 영어의 뉘앙스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도움을 준 지인들의 면면에서 알 수 있듯 김송현은 열정 넘치는 문학도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시 쓰기를 즐겼다. 피아노를 전공으로 시작한 건 그 이후인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 한강 작가의 소설 <희랍어 시간>을 무척 좋아하지만 ‘단순한 진심’을 쓴 소설가 조해진, ‘여름은 오래 그곳을 남아’를 집필한 마쓰이에 마사시도 아낀다. 프랑수아즈 사강과 같은 유럽 작가에게도 관심이 많다. 이런 그에게 작가 임경선은 사강과 같은 프랑스 여성 소설가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작품 등을 선물하곤 했다.
김송현은 독립 서점인 ‘서점 리스본’과 북 토크로 진행한 ‘문학의 밤’에서 문인들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각자가 한 해 읽었던 책 중 가장 마음에 남는 한 페이지를 뽑아서 오는 자리였어요. 각자 자신이 고른 페이지를 낭독한 뒤 제가 이에 맞춰 즉흥 연주를 하거나 어울리는 곡을 쳐주는 행사였는데 엄청 재밌었어요. 2시간 길이로 하려던 행사가 4시간으로 길어졌죠! 이번엔 타임스케이프에 담긴 곡들을 들은 뒤 각자 떠올리는 글의 페이지를 들고 오면 제가 연주를 하는 방식으로 북 토크를 진행하게 됐어요. 글의 출처는 뭐든 상관없답니다.”

“예술은 나누는 것”
김송현은 앨범에 담을 글을 쓰면서 연주자로서의 자신은 배제했다. 그렇다면 문학은 그에게 연주에서 유리된 도피처가 아닐까. 스케이프의 어원이 노르드어로 ‘벗어나다’란 뜻이어서 탈출을 뜻하는 ‘이스케이프(escape)’에 쓰인 것처럼. 그는 문학이 연주에 주는 영향을 규정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전 책의 서사보다는 문장을 어떻게 썼는가에, 그리고 시에 더 영향을 받아요. 음악에 프레이징이 있듯 시에도 줄 바꿈이 있잖아요. 게다가 아는 어휘가 많아지고 더 정확한 어휘를 쓸수록 음악에서도 표현의 폭이 넓어져요. ‘동트기 전 새벽’라고 하면 총체적인 인상인데, ‘물안개가 깔린 와중에 아득한 먼 곳에서 그리운 것들이 다가온다’라고 하면 심상이 더 정확하게 드러나는 것처럼요.”
이 관점은 음악을 언어의 연장선으로 본 인물들과 궤를 같이한다. 먼 과거엔 “음악은 말의 하인”이라고 했던 몬테베르디가 그랬고 20세기엔 음악을 확장된 말로 봤던 야나체크가 그랬다. 김송현은 예술 간의 연결고리를 탐구한다. 클래식 앨범을 수집하길 좋아한다는 배우 심은경에게 먼저 SNS로 자신의 앨범을 보낸 뒤 사이가 가까워져 6시간 동안 예술 얘기를 나눴다는 일화나 뉴에이지 작곡가로 유명한 이루마에게 응원 메시지와 자신의 작품을 보냈던 일화는 예술인 사이에서 접점을 찾으려는 그였기에 가능했던 이야기다.

물론 중심은 피아노다. 김송현은 오는 3월 16일 롯데콘서트홀 리사이틀을 시작으로 자신의 첫 전국 순회공연을 앞두고 있다. 같은 달 15일엔 코리아챔버오케스트라(KCO)와, 21일엔 KBS교향악단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올해 헤이스팅스 국제 피아노 콩쿠르와 루빈스타인 국제 피아노 콩쿠르도 치른다. 이를 위해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백혜선, 당타이손 등에게서 배우면서 음악에 깊이를 더하고 있다. 다만 음악가로서의 목표가 콩쿠르 너머에 있을 뿐이다. “다른 분야에서 성취를 이룬 사람들과 예술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 것”이라고.
그는 이번 앨범에 자신의 방식으로 계절감을 담아낸 사진들도 함께 실었다. 장르의 경계에 자신의 예술을 가두지 않으려 한 시도였다. “어렸을 땐 ‘손열음 선생님과 연주할 거야, 정경화 선생님과 듀오를 할거야’ 이렇게 생각했다가 조금씩 관심사가 문학, 연기, 가수 등으로 넓어지더라고요. 언젠간 영화 음악도 작곡해보고 싶어요. 5살에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피아노를 사주셨는데 그땐 악보 볼 줄 모르니 그냥 치고 노는 걸 좋아했거든요. 피아노 수업보다 작곡 수업을 먼저 받았는데 나중에는 전문적으로 작곡을 파고 들어보고 싶기도 해요. 서로 다른 장르나 연주자들을 이어서 새로운 무언가를 표출하는 사람이 됐으면 합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