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태평양 주요국이 지속가능성 공시의무화를 속속 도입하고 있다. 호주·싱가포르·대만·홍콩·일본 등은 2025년 회계연도 전후를 기점으로 ISSB(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 기준을 중심에 둔 공시 체계를 단계적으로 적용하며, 상장 대기업을 시작으로 적용 범위를 넓혀가는 흐름을 보인다. 한국도 이러한 국제 흐름의 한복판에 서 있다. 지속가능성 공시의무화가 눈앞으로 다가온 지금, 각국의 상황을 검토하며 우리에게 맞는 방식을 고민할 때다.
〈한경ESG〉는 콘퍼런스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줄리아 테이(Julia Tay) 에른스트영(EY) 아시아·태평양 공공정책 리더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싱가포르 출신의 줄리아 테이 리더는 대화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공시의무화 동인과 ISSB 도입의 공통 경로, 국가별 차이점, 시행 과정에서 드러난 난점과 교훈을 짚었다. 나아가, 싱가포르의 도입 사례를 소개하고 한국이 규제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한국이 경쟁력을 갖춘 그린 기술 분야에서 어떻게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을지에 대해 조언했다.
줄리아 테이 리더는 “지속가능성 공시는 목표가 아닌 전략 결과이며, 성공은 보고서의 ‘완성도’가 아니라 기업전략의 ‘실행력’과 ‘실질적 변화’로 증명된다”고 강조했다.
- 최근 호주·싱가포르·대만·홍콩·일본 등 주요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이 지속가능성 공시를 의무화하기 시작했다. 그 동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아시아 각국의 지속가능성 공시의무화 동인은 투명성에 대한 글로벌 압력 증가, 지속가능 투자 유치를 위한 글로벌 경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투자자, 규제당국, 이해관계자들은 기업이 지속가능성 관행과 그 영향을 공시할 것을 점점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2023년 6월에 발표한 ISSB 기준은 투자자 중심의 지속가능성 공시에 대한 글로벌 최소 기준을 제시하며, 이를 재무보고와 통합함으로써 투자자들이 지속가능성 관련 위험과 기회를 평가하도록 돕고 있다. 2015년 채택된 파리기후변화협약은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2℃ 이하로 억제하기 위한, 거의 모든 국가가 참여한 법적 구속력을 지닌 국제조약이다. 평균기온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흔히 말하듯 ‘측정되는 것은 실행된다(What gets measured, gets done)’는 점이 중요하다.”
- 각국은 ISSB 기준을 중심으로 글로벌 기준을 어떤 일정과 규제 방식으로 도입하고 있나.
“산업구조와 시장 인프라에 따라 규제 설계에 차이는 있지만, 현재까지 ISSB 기준 도입 양상은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많다. 대부분의 국가는 단계적 접근 방식을 채택해 우선 대형 상장사를 대상으로 적용하고 있으며, ISSB가 허용한 경과 조치(전환적 완화) 또는 추가적 규제 완화를 제공한다. 도입 일정 측면에서는 호주·홍콩·싱가포르가 2025 회계연도부터 ISSB 기준에 따른 보고를 시작할 예정이며, 대만은 2026 회계연도, 일본은 2027년 3월 종료 회계연도부터 적용을 시작한다. 다만 이들 국가 모두 준비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대형 상장사를 우선 대상으로 단계적 시행을 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 아시아 국가의 경우 규제 방식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면.
“규제 방식 측면에서는 호주·홍콩·싱가포르가 상장 여부와 관계없이 대형 비상장기업까지 공시의무를 확대해 주요 배출원을 포괄한다. 또 이들 국가는 기업의 부담을 관리하기 위해 기후 우선(climate-first) 접근 방식을 채택했다. 호주·홍콩·싱가포르·대만은 ISSB 기준 채택 이전에 이미 이행 로드맵을 발표했지만, 일본은 기준을 먼저 채택한 뒤 현재 이행 로드맵의 공식화를 진행 중이다. 일본의 기준은 ISSB와 정합성을 유지하면서도, 국제 자본 조달을 목표로 하지 않는 국내 기업을 고려해 일정 수준의 현지 적응(local adaptation)을 허용하고 있다.”
- 아시아 각국이 지속가능성 공시의무화 과정에서 직면한 어려움에는 어떤 것이 있었나.
“겉으로는 다른 국가들이 앞선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일부 국가는 시행 과정에서 정책을 수정해야 했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EU)은 기업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 첫 적용 단계에서 CSRD 옴니버스 제안(EU CSRD Omnibus Proposal)을 통해 중대한 변경을 제안하면서 기업에 상당한 불확실성을 초래했다. 싱가포르 역시 중소기업의 준비 부족에 대한 업계 의견을 반영해 시행 일정을 연장했다. 또 한국에서는 KSSB가 이미 ISSB 기준을 채택하는 작업을 완료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제 중요한 점은, 정부가 투자자의 기대에 부합하면서 기업의 이행을 지원할 수 있는 규제 프레임워크를 결정하는 것이다.”
- 한국이 향후 가장 시급하게 추진해야 할 정책 조치는 무엇이라고 보는지.
“먼저 적용 범위의 명확화다. 기업은 새로운 규제 적용 대상과 범위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국가는 상장사와 기후 공시(IFRS S2)에 따른 기후 공시를 우선 적용하고 있으며, 향후 산업 전반의 준비도가 높아지면 범위를 확대한다. 다음은 단계적 시행이다. 한국 역시 단계적 시행을 통해 중소기업이 과도한 부담 없이 점진적으로 적응하도록 할 수 있다. 이는 규제 준수 부담과 가치 창출 간 균형을 맞추는 데 중요하다.
또 중요한 것은 경과 조치 및 완화 제공이다. 다수 국가가 IFRS S1 경과 조치를 적용해 첫해에는 IFRS S2에 집중하고, 기타 지속가능성 주제 공시는 이후로 유예하고 있다. 또 초기에는 스코프 3(총외부배출량)나 비교 정보 공시를 요구하지 않는 등 완화 조치를 제공하고 있다. 호주는 초기 약 3년간 특정 미래지향적 기후 공시(스코프 3, 시나리오 분석 등)에 대해 이사 개인을 민사소송으로부터 보호하는 세이프 하버(safe harbour) 조항을 도입했다.”
- 싱가포르는 공시, 분류체계, 데이터 인프라, 금융상품이 결합된 그린 파이낸스 생태계를 구축했다. 이 모델이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싱가포르의 그린 파이낸스 생태계에서 한국에 적용 가능한 주요 교훈은 다음과 같다. 먼저 통합적 프레임워크를 채택했다는 점이다. 공시, 녹색분류체계, 데이터 인프라를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통합한 점이다. 또 규제 및 정책 지원이다. 싱가포르는 그린 파이낸스 혁신을 위해 1억 싱가포르 달러를 투입했다. 한국도 세제 혜택 등 정책적 지원을 확대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투명성과 공시 강화, 공공·민간 협력, 역량 강화 및 교육 투자 등이다. 한국도 강력한 금융 시스템, 기술혁신 역량, 그리고 2020년 7월 출범한 그린뉴딜 등 정부의 지속가능성 의지를 바탕으로 이미 튼튼한 기반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 한국이 대규모 탈탄소 프로젝트에 충분한 자본을 공급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가장 시급하게 강화해야 할 요소는 무엇인가.
“글로벌 금융 시스템 전반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2가지 핵심 장벽은 다음과 같다. 단기수익 중심의 투자 관행과 높은 위험 인식이다. 이 외에도 명확한 분류체계 부족, 데이터와 표준 지표 미비, 전문성 부족, 정책의 단절성이 문제로 작용한다. 이에 따라 한국은 다음에 집중해야 한다. 장기투자 전략 수립, 공공·민간 자금을 결합한 블렌디드 파이낸스 확대, 데이터 인프라·역량 강화 및 규제 명확화다. 특히 전환 활동을 지원하면서 탄소 고착을 피하기 위해서는 과학 기반의 명확한 전환 기준 수립, 그리고 유연성과 정기적 검토 메커니즘 도입이 필요하다.”
- 한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그린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는 기술 분야가 있나.
“한국은 첨단 제조 역량과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 산업을 바탕으로 그린 해운 분야에서 글로벌 리더십을 확보할 잠재력이 크다. 다만 특정 기술에 대한 집중 지원은 혁신 가속이라는 장점과 함께 기술 고착, 자원 편중, 형평성 문제라는 위험을 수반한다. 따라서 경쟁 우위가 있는 분야를 우선하되, 유연성을 유지하는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
- 지속가능성 공시가 단순한 체크리스트에 그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떤 정책적 장치가 필요할까.
“우선 글로벌 기준 기반의 공시 체계를 갖추고, 독립적 검증을 의무화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실효성 있는 집행이 뒤따라야 한다. 중대성 평가를 강화하고 재무 성과와의 연계를 잘 설계하며, 마지막으로 참여하는 기업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 및 역량 강화를 위해 지속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좋다.”
- 한국 정책결정자에게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가 있다면.
“지속가능성 공시는 전략의 결과일 뿐 목적이 아니다. 성공 핵심은 명확한 전략, 철저한 실행, 그리고 실질적 영향에 있다. 공시가 기업의 의사결정과 자본 배분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정책 장치에 집중해야 하며, 이는 이미 성과를 내고 있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과도 연계될 수 있다. 이를 통해 한국은 기업과 사회 모두에 지속가능한 가치를 창출하는 선도 국가가 될 수 있다.”
구현화 한경ESG 기자 ku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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