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롯데콘서트홀 객석은 거의 만석이었다. 정명훈이 KBS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후 첫 공연에 쏠린 관심이 느껴졌다. 큰 키에 긴 머리를 한 객원 악장 이리나 야쿠프코바(체코필 부악장)가 미소를 띠며 나와 조율을 했다. 잠시 후 검은 옷의 두 남자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와 정명훈이 등장, 첫 곡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를 시작했다.
정중하고 우아하게 시작한 반주는 곡이 끝날 때까지 인상적인 경험으로 다가왔다. KBS교향악단뿐 아니라 국내 모든 악단에서 볼 수 있는 협주곡 반주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정성스러운 연주였다. 깊이와 양감이 있는 전주에 이어 서두르지 않고 합류한 바이올린은 점차 절도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고음을 넉넉히 짚으며 프레이징에 자기만의 무게를 실었다. 정명훈은 고개를 흔들며 세밀한 부분까지 독려했다. 비브라토는 적절하고 견고했다. 경사를 내려가는 듯한 급박함보다는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는 안정감이 지배적이었다. 빠른 악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강렬한 보잉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굽이를 함께 타며 호쾌하게 총주로 터졌다. KBS교향악단이 이렇게 당당하고 큰 존재감의 오케스트라였던가.

반면 바이올린은 따스하고 친절했다. 오케스트라가 점점 빠르고 강렬해지는 부분도 있었다. 카바코스에게 카덴차는 고비였다. 고음이 조금 거칠다 싶었는데 많은 청중이 숨을 죽인 무게가 금빛 음 하나하나에 실렸다. 바이올린의 프레이징은 설득력 있었지만, 세부의 정확한 음정이 요구되는 부분에서는 불안감이 노출됐다. 정명훈이 이끄는 반주는 완급을 조절하며 절묘했다. 1악장 마지막의 피날레는 장엄했다. 다행히 박수를 치는 관객은 한 명도 없었다.
카바코스가 짧게 바이올린 조율을 한 뒤 2악장을 시작했다. 오케스트라는 뚜렷하고 바이올린은 뒤로 물러선 파스텔톤이었다. 정명훈은 엄격하게 반주를 통제했다. 플루트의 청아함이 바이올린으로 옮겨가는 듯 느껴졌다. 텐션이 풀린 듯한 카바코스의 바이올린은 팽팽하게 감긴 오케스트라의 현악군과 대조적이었다. 바이올린과 플루트가 주고받는 부분은 오페라 아리아처럼 극적이었다. 3악장은 중후하면서도 경쾌했다. 카바코스는 마치 파가니니처럼 속주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교를 들려줬고, 오케스트라와 어긋난 곳도 있었지만 쾌속으로 끝을 맺었다. 앙코르는 바흐 파르티타 3번 중 루르. 산책하듯 자연스럽고 빼어난 연주였다. 곡이 끝난 뒤 5초 이상 침묵을 지킨 관객들 사이로 제의적인 공감이 번져가고 있었다.

2부의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은 KBS교향악단에 도전이었다. 외국 악단들도 만족스러운 연주를 끌어내기 어려운 난곡이다. 도입부가 서먹해서 걱정됐지만 기우였다. 점차 집중력이 높아졌고, 특히 저음현의 뒷받침이 귀에 들어왔다. 피아니시모로 고요해지는 부분에서는 감탄이 절로 났다. 약음을 잘 낼 수 있으면 한없이 거대해질 수 있는 법이다. 청아한 목관과 투명한 현악군이 교차했다. 특히 객원 플루트 수석 토메르 암라니가 발군이었다. 곡의 얼개가 투명하게 보이는 대신 모두를 감싼 외피의 존재는 희박했다. 반복이 많았지만 지루하지 않은 건 지휘의 공이다. 한눈에 들어오는 산의 능선과 맑은 공기가 떠올랐다.
경건하고 엄숙하게 시작한 2악장 장송행진곡은 깊이가 있었다. 유유자적한 템포는 그냥 느린 게 아니었다. 농밀한 경험의 집적과도 같이 다가왔다. 거대한 짐승이 죽어가는 묘사 같다가 최후의 일격을 발휘하는 정명훈의 유동적인 템포는 도도한 흐름을 유지했다.

3악장은 발랄하게 시작했고 생명력이 충만했다. 유명한 호른 중주는 밝고 출중하게 전개됐다. 깊고 고요한 곳에서부터 장대하게 이어지는 다이내믹도 돋보였다.
4악장에서 현 피치카토가 ‘에로이카 변주곡’으로도 유명한 주제를 연주했다. 플루트의 활약이 여전했고 호쾌함과 치열함, 경이로움이 섞인 장엄함이 피어올랐다. 모든 악기들이 발산하는 빛이 모여 숭고함을 이루는 장면은 KBS교향악단의 연주로 오랜만에 접했다. 독일적인 견고함과는 거리가 있는 정중하고 우아한 베토벤이었다. 약음부터 신중하게 만들어가는 노련한 마에스트로. 그가 키를 잡은 KBS호의 순항을 예상할 수 있는 취임 일성이었다. 류태형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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