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1년 영국 런던의 하이드파크에 철골과 유리로 된 거대한 크리스탈 궁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의 주도로 인류 최초의 박람회인 만국박람회(The Great Exhibition)가 이곳에서 열렸다. 목표는 분명했다. 박람회의 수익금으로 예술과 산업을 결합한 박물관을 세우고자 한 것. 단순히 귀족의 수집품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들과 제조업 종사자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어 영국의 디자인 수준을 높이겠다”는 뜻이 확고했다. ‘모두를 위한’ 실용적이고 교육적인 목적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빅토리아앤앨버트(V&A) 뮤지엄의 개관으로 현실이 됐다. 170년 넘게 세계 최고 공예박물관으로 자리 잡게 한 위대한 유산이다.

그 유산은 ‘최초’의 역사를 여러 번 쓰게 했다. V&A는 세계 최초의 박물관 카페가 1868년 문을 열어, 누구나 편히 박물관을 찾아 쉬거나 대화할 수 있게 됐다. 세계 최초로 가스등을 박물관에 설치, 야간 개장을 시작해 낮에 일하는 노동자들이 퇴근 후에도 박물관을 찾아올 수 있도록 개방했다. 전 세계 거대한 건축물이나 조각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실제 크기와 똑같은 ‘석고 캐스트’를 제작해 전시한 것도 V&A가 최초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혁신을 이뤄낸 V&A의 눈은 이제 런던에서 가장 소외된 곳, 동부를 향하고 있다. 런던의 부촌인 사우스켄싱턴에 있던 V&A가 동부 스트랫퍼드에 개방형 수장고 박물관인 ‘V&A EAST Storehouse·이하 V&A이스트’ 를 개관하면서다. 베일에 쌓여있던 25만 점의 소장품과 30만 권의 아카이브를 실시간 보존·관리되는 현장을 볼 수 있고, 사전 신청을 하면 누구나 수장고에서 막 꺼낸 과거의 유물을 코앞에서 1:1로 만나고 직접 만져볼 수 있다. 2012년 런던올림픽 당시 미디어 센터로 쓰였던 공간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민주적인 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데이비드 보위가 남긴 9만 점이 눈앞에
지난해 가을 찾아간 런던 V&A 이스트. 첫인상은 마치 이케아 쇼핑몰과 비슷했다. 철골로 지어진 내부 공간에선 보물찾기나 술래잡기 놀이를 하듯 마음대로 동선을 구상할 수 있다. 보석과 의상과 가구, 도자기와 건축 유산, 그리고 고대 유산까지 곳곳에 놓인 소장품을 찾아다니는 재미로 시간의 개념마저 흐려졌다. 유물을 감싸는 그 흔한 유리장도 없다. 이곳에선 화려한 조명 아래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모든 작품을 마치 평범한 일상에서 당장 사용할 수 있을 것처럼 감상한다. 6개월에 한번씩 100여 점의 소장품 일부가 주기적으로 교체되는데, 큐레이터가 직접 선정한 소장품들이 ‘컬렉팅 이야기’ ‘디자인 소스북’ ‘일하는 미술관’ 등의 세 가지 주제로 나뉘어 전시된다.


V&A 이스트를 더 특별하게 만든 건 지난해 9월 13일 개관한 ‘박물관 속의 박물관’, 데이비드 보위 센터다. 첫 전시가 개막한 지 한달 여가 지난 시점이지만 이미 한 달치 예약이 꽉 차있던 이 공간엔 20세기를 상징하는 전설의 예술가 데이비드 보위(1947~2016)가 남긴 9만여 점의 아카이브가 숨쉬고 있었다.
전시장엔 그가 입었던 의상, 악기, 손글씨로 쓴 가사 노트, 스케치까지 200점이 걸려있고 배경음악으로 그가 남긴 음악이 흘러나왔다. 관람객들의 발길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지기 스타더스트(Ziggy Stardust)’ 의상 앞.
지기 스타더스트는 데이비드 보위의 1972년 앨범과 함께 탄생한 가상의 페르소나다.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앨범이 그 주인공. 붉은 머리, 파격적 화장과 성별을 파괴한 '화성에서 온 외계인 록스타'는 대중문화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 시기 데이비드 보위는 일본 디자이너 칸사이 야마모토가 디자인한 기하학적 무늬의 점프 수트와 비대칭의 의상들을 입어 패션 혁명에도 일조했다. TV 화면으로만 보던 전설적인 의상의 정교한 자수와 질감을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된 관람객들은 탄성을 멈추지 않았다. 데이비드 보위는 모든 활동을 기록하는 철저한 기록광이기도 했는데, 지기 스타더스트 시절의 공연 포스터와 무대 스케치, 팬레터와 소품들까지 모두 V&A가 소장하고 있다.

데이비드 보위는 왜 V&A에 9만 점의 아카이브를 모두 기증했을까. 그 이유는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V&A가 런던 본관에서 ‘David Bowie is’라는 제목의 전시를 열었을 때다. 당시 오디오 브랜드 젠하이저와 협업해 관람객 위치에 따라 음악과 내레이션이 바뀌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몰입형 전시’의 새 기준을 만든 전시였고, V&A 역사상 가장 빠른 티켓 매진 속도를 기록했다. 이 전시는 세계 12개 도시를 순회하며 2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동원했다. 박물관과 긴 대화를 해온 데이비드 보위 재단은 2023년 그의 모든 아카이브를 기증하기로 했다. 나일 로저스 등 유명 아티스트가 객원 큐레이터로 참여해 보위의 아카이브를 재해석하는 등 살아있는 연구실로 자리매김하며 단번에 런던의 새 명소가 됐다.

“1954년 발렌시아가 드레스, 가까이 보고싶으면 주문하세요”
V&A 이스트에는 관람객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1:1로 소장품을 열람할 수 있는 ‘오더 언 오브젝트(Order an Object)’가 대표적이다. 특정 아카이브의 소장품을, 온라인 카탈로그에서 최대 5점까지 사전 신청하면 전문 핸들러가 수장고에서 유물을 꺼내 ‘소장품 연구센터’로 가져와 세팅한다. 물론 이 공간 역시 개방되어 있어 ‘나만의 유물을 직접 바라보는 사람을 바라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한다. 만 16세 이상은 누구나, 어린이의 경우 보호자와 함께 게스트로 참여할 수 있고 4시간 동안 가까이에서 유물을 감상하고 연구할 수 있다. 로잘리 김 V&A 한국관 큐레이터는 “패션, 공예 등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 전공자나 연구자가 쉽게 열람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며 “예술가가 밀집해 사는 런던 동부의 특성이 이 공간의 기능을 극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오더 언 오브젝트’를 통해 가장 많이 열람 요청이 들어온 품목 중 하나는 1954년 제작된 발렌시아가 드레스. 누군가 정해놓은 것을 정해진 동선으로 바라보는 게 일반적이었던 전시 관람 관습을 뒤집고 관람객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는 거대한 미래형 박물관의 핵심 기능이다.
경계없는 수집, 문턱 낮춘 수장고
미술관과 박물관의 역사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이던 수장고를 개방된 공간에서 마주하는 경험은 낯설고 특별하다. 어떤 유물의 역사와 이름을 알고 난 뒤엔 스릴마저 느껴진다. ‘이게 이렇게 놓여 있어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스페인 토리호스 궁전 천장, 1930년대 카우프만의 사무실, 17세기 무굴제국 아그라 요새의 기둥, 현대 부엌의 원류인 20세기 프랑크푸르트 키친. 피카소가 디자인 작업에 참여한 발레 뤼스 발레단의 ‘르 트레인 블루’ 공연의 무대 배경 등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대형 작품들도 곳곳에서 위용을 자랑한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박물관 중심부에 놓인 ‘로빈후드 가든즈’ 외벽 일부. 1972년 완공된 로빈후드 가든즈는 브루탈리즘과 사회주택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2008년 철거 계획이 발표됐다. 당시 자하 하디드, 리차드 로저스 등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반대했음에도 2017년 완전 철거됐다. V&A는 이 건물 3개 층의 외벽과 그 안 두 가구 주택을 보존하기로 결정하고 소장품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이 건물의 형태는 한국 관람객에게도 익숙한데, 당시 V&A가 ‘집’을 주제로 작업해온 한국인 현대미술가 서도호에게 커미션 작업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서도호 작가는 철거 전 거주민과 소통하며 건물의 외관과 내부를 파노라마 타임랩스, 3D스캐닝 기술로 기록해 영상 작업으로 남겼다. V&A이스트에 재현된 실제 외벽 뒤로 그의 프로젝트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런던=김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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