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EU)이 올해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본격적으로 시행하면서 한국 수출 기업을 둘러싼 통상 환경도 급변할 조짐이다. 당장 눈에 띄는 비용 부담은 없지만, 제도 구조상 올해 수출 실적이 내년 ‘탄소세’로 돌아오는 만큼 정부와 업계 모두 선제 대응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월 2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범부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종합 대응 작업반’ 회의를 열어, 기업들의 제도 대응 현황과 정부 지원 대책을 전면 점검했다.

“탄소 누출 막겠다”…EU 기후 정책의 핵심 수단
CBAM은 EU가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목표로 추진 중인 ‘유럽 그린딜’과 ‘핏 포 55’ 패키지의 핵심 정책 중 하나다. EU 역내에서 강화된 탄소규제로 생산비용이 상승할 경우 기업들이 규제가 느슨한 역외 국가로 생산을 이전하거나 고탄소 수입품이 늘어나는 ‘탄소누출’ 현상을 차단하겠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EU는 역외에서 생산해 EU로 수입되는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력, 수소 등 6대 고탄소 품목에 대해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온실가스배출량만큼 비용을 부담하도록 했다. 이는 역내 기업과 동일한 수준의 탄소비용을 수입품에도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CBAM은 올해 본격적인 시행에 앞서 2023년 10월부터 2025년 12월까지는 ‘전환 기간’을 두었다. 이 기간에는 인증서 구매 의무 없이 분기별로 제품별 탄소배출량을 보고했지만 올해 1월 1일부터는 본격적인 시행 단계에 들어가, EU 수입업자는 전년도 수입품의 내재 배출량에 상응하는 CBAM 인증서를 구매해 제출해야 한다.
문제는 비용이 발생하는 시점이다. 일반적 관세가 통관 시점에 부과되는 것과 달리 CBAM에 따른 탄소비용은 ‘수입 다음 해’에 확정·정산된다. 이에 따라 올해 EU로 수출한 물량의 탄소배출량이 내년에 한꺼번에 비용으로 청구될 전망이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올해는 조용하지만, 내년에 영수증이 몰려올 것이다”라며 우려하고 있다.
철강·알루미늄 등 주력 산업 직격
특히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등 한국의 주력 수출 산업은 CBAM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다. 이들 품목은 생산공정 특성상 탄소배출량이 높아 인증서 부담이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다. 기업 입장에서는 올해 수출 물량에 대한 탄소비용이 이미 ‘차곡차곡 누적’되고 있는 셈이다.
EU는 제품별 ‘내재 배출량’ 기준으로 인증서 수량을 산정한다. 내재 배출량은 생산과정에서 직접 발생한 배출과 일부 품목의 경우 사용 전력에서 발생한 간접 배출까지 포함된다. 철강·알루미늄·수소는 직접 배출만 적용되지만, 시멘트·비료·전력은 간접 배출도 포함된다.
CBAM 인증서 가격은 EU 배출권거래제(EU-ETS)와 연동된다. 매주 EU-ETS 배출권의 평균 가격을 기준으로 인증서 가격이 결정되며, EU 역내 산업에 제공되던 ETS 무상 할당은 2026년부터 2034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지된다. 무상 할당이 줄어드는 만큼 CBAM을 통해 수입품에 부과되는 부담은 점차 확대될 전망이다
다만 원산지 국가에서 이미 탄소가격을 지불한 경우 해당 비용은 인증서 제출 시 차감받을 수 있다. EU는 국가별 ‘기본 탄소가격’을 마련해 차감 절차를 간소화할 계획이다.
제도 간소화 움직임…면제 기준·기한 완화
CBAM은 제도 도입 초기부터 과도한 행정 부담과 복잡한 규정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이에 따라 EU는 2025년 ‘옴니버스 패키지’를 통해 CBAM 일부 규정을 개정했다. 가장 큰 변화는 면제 기준이다. 기존에는 선적당 150유로 이하 물량이 면제 대상이었으나, 개정 후에는 철강·알루미늄·시멘트·비료의 경우 연간 누적 수입량 50톤 이하 기업은 CBAM 적용에서 제외된다. 또 인증서 판매 시점은 2027년 2월로, 제출 기한은 9월 말로 연기됐다. 분기별 인증서 보유 의무 비율도 80%에서 50%로 완화돼 기업의 자금 부담을 줄였다.
정부는 CBAM이 사실상 새로운 형태의 무역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다. 박정성 산업통상부 차관보는 “CBAM 시행은 우리 수출업계에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며 “정부는 해당 제도가 무역장벽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EU 측과 지속적으로 협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 기업이 제도 변화를 위기로만 보지 않고, 저탄소 생산 체제 구축과 경쟁력 강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 이행, 배출량 산정, 검증 대응 등을 빈틈없이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설명회와 교육·연수 과정을 확대해 기업의 이해도를 높이고, 탄소배출량 산정 및 검증을 위한 지원사업도 적극 활용할 방침이다. 내년부터 공식 검증이 시작되는 만큼 국내 검증 기관 확보와 대응 체계 구축도 속도를 낼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CBAM이 단기적 비용 부담을 넘어 중장기 산업 구조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EU는 향후 CBAM 적용 품목을 확대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EU-ETS가 규제하는 전체 배출량 범위와 유사한 수준까지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결국 기업 경쟁력의 핵심은 ‘탄소 데이터 관리 능력’과 ‘저탄소 생산 전환 속도’가 될 전망이다. 올해 EU 수출 실적이 내년 탄소비용으로 돌아오는 첫해를 앞두고, CBAM은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미경 한경ESG 기자 esit91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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