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일 오후 3시, 타일야드에서 스트리트 파티를 엽니다. 무료고요. 내일 만나요.” 지난해 10월 벨기에 출신의 DJ 샬롯 드 비테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짤막한 문구다. 이튿날 런던 타일야드 거리는 파티를 즐기려는 인파로 가득 찼다. 당초 계획한 영국 공연이 전석 매진된 가운데 잘 나가는 DJ의 음악을 직접 귀로 즐기려는 사람들이 모이면서다.
별도의 디지털 캠페인이나 돈을 들인 홍보 없이도 구름인파를 끌어모은 이 시도는 원초적인 ‘오프라인의 힘’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지손가락 알고리즘에 빠진 현대인에게 특정 장소에 모여 감각을 현실화하는 경험은 예술적 자극이 되는 동시에 그 자체로 강력한 마케팅이 된다는 뜻이다.
이런 오프라인의 역습은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도 관찰된다. 내달 개봉하는 류승완 감독의 신작 ‘휴민트’의 독특한 마케팅이 그렇다. 시끌벅적한 SNS에 올린 파편적인 바이럴 대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한켠의 조용한 이간수문 갤러리 벽면을 먼저 선택했다. 지난 12일부터 25일까지 2주 간 미공개 스틸, 예고영상을 선보이는 특별전을 열었다. 기꺼이 시간을 내 발걸음한 예비관객에게 올해 극장가 기대작의 실마리를 파악할 수 있는 판을 미리 깐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국경에서 발생하는 범죄를 파헤치다 만난 남북한 비밀요원이 격돌한다. 짙어지는 의심과 불확실한 진실 속 각자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향한다. 시놉시스에서 눈치 챌 수 있듯, 첩보 액션물 ‘휴민트’의 영화적 질감은 묵직하고 서늘하다. 공간을 메운 어둠 속 한 줄기 강렬한 빛의 대비를 보여주는 바로크 회화의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명암대비)처럼 뜨거운 감정이 차가운 분위기에 침잠해 있는 순간순간이 그려진다.
전시장에 걸린 특별한 사진들은 이런 관람객의 영화에 대한 상상을 선명하게 바꾼다. 라트비아에서 촬영한 영화의 스틸 이미지들은 현장의 날카로운 겨울 공기를 옮겨놨다. ‘휴민트’는 약 6개월 간 라트비아 로케이션 헌팅을 했다. 영화의 메인 배경인 블라디보스토크와 비슷한 풍광을 가진 데다, 13년 전 류 감독이 영화 ‘베를린’ 제작 당시 라트비아에서 촬영하며 좋은 결과물을 얻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 걸린 김진영 작가의 미공개 스틸컷들은 유럽 귀퉁이의 쓸쓸한 정취를 정교하게 담아냈다.

눈길을 끄는 건 공식 스틸 이면에 있는 ‘배우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이다. 70점의 작품 중 35점의 작품엔 김진영 작가의 이름이 쓰였지만, 나머지 35점에는 배우 박정민의 이름이 적혔다. 박정민은 영화에서 북한 국가보위성 조장으로 대한민국 국정원 조 과장(조인성)과 대립하는 박건을 맡아 연기했다. 작가, 책방 주인 등 연기를 벗어나 예술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는 박정민은 라트비아 현지에서 무작정 필름과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촬영현장, 동료 얼굴, 주변 풍광을 렌즈에 담았다.
김 작가의 공식스틸이 영화의 묵직한 세계관을 보여준다면, 박정민의 작품에선 뷰파인더 너머의 애정 어린 시선이 돋보인다. 대사 외에 배우와 감독이 예비 관객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통로가 되는 셈이다. 배급사 측은 “전시를 염두하고 사진을 찍지는 않았지만, 특별전을 기획하면서 관객과 소통할 좋은 창구가 됐다”면서 “배우가 직접 사진 보정과 작품 배치 등 전시 준비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했다”고 말했다.
영화를 홍보하는 기획전시가 DDP에서 열리는 건 그 자체로 이색적이다. 디자인과 건축,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의 프로젝트가 주로 열리는 DDP에선 맥락 없는 노골적 ‘팝업 스토어형’ 상업 이벤트는 들어가기 쉽지 않다. 그만큼 이번 특별전이 일방적인 영화 광고를 넘어 로케이션의 미학을 담은 사진전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지난 수년 간 영화 마케팅 문법을 관통한 건 SNS 바이럴이었다. 숏폼 콘텐츠 소비 트렌드에 맞춰 짧은 릴스나 영상으로 눈길을 사로잡고, 밈(meme)을 확산시켜 입소문을 태우는 방식이었다. 다만 휘발성이 강한 디지털 환경에서 영화를 가벼운 스낵 콘텐츠로 접해야 하는 관객들의 피로감도 적지 않았다. 전문성 높은 예술관련 잡지를 구독하는 등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를 깊이 있게 탐구하거나 직접 눈과 귀로 느끼는 ‘디깅(digging)’ 소비의 확산이 그 반대급부다. 실제로 NEW에 따르면 이번 특별전은 사전 신청으로만 2500명의 관람객이 몰렸다.
이소정 NEW 홍보마케팅 과장은 “최근 콘텐츠 소비 패턴이 숏폼 등으로 바뀌었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문화 역시 강해지고 있다”면서 “영화의 스케일과 서사를 말로 설명하기보단 예비 관객을 영화적 공간에 초대해 느끼게 하는 방식이 효과적이라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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