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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바이오산업 정책, 과학적 관점의 접근이 필요

입력 2026-01-27 09:46   수정 2026-01-27 09:57

글로벌 바이오 전쟁, 안보와 경제전략의 핵심
전 세계 바이오 시장은 2023년 1조 50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전문기관에 따르면 향후 글로벌 바이오 시장 규모는 2028년 2조 달러 수준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바이오 시장이 연평균 6%대 이상의 꾸준한 성장이 예상되는 가운데 미국과 중국, 유럽 등의 주요국들은 바이오산업을 단순한 산업 차원을 넘어 국가 안보와 경제 전략의 핵심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미국의 움직임이 가장 공격적이다. 2022년 조 바이든 행정부는 바이오 제조 기반 강화를 위한 행정명령을 발동하며 연구개발(R&D), 인력양성, 제조·생산 기반 확충 등을 위해 향후 5년간 28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특히 “미국에서 개발한 기술은 미국에서 생산한다”는 명확한 기조 아래, 국립보건원(NIH) 산하 첨단연구계획청(ARPA-H)을 신설하고 알츠하이머병, 암 등 난치질환 혁신 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은 연간 50건 안팎의 신약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하며 전 세계 바이오 리더십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도 ‘중국제조 2025’의 10대 핵심 산업에 바이오를 포함하고 2035 바이오 굴기를 선언하여 바이오 생산설비와 공급망 확보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지난 2018년부터 선전 지역에 7200억원을 투자하여 거대 바이오파운드리 클러스터를 구축 중에 있다.

유럽도 만만치 않다. 독일 바이온텍의 mRNA 백신 성공은 유럽 바이오산업의 잠재력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영국, 스위스, 프랑스 등도 바이오 생산거점과 혁신센터 구축 등을 통해 첨단 바이오의약품의 제조 선도와 공급망 구축을 위해 진력을 다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 어떠한가. 식약처에 따르면 2023년 국내 의약품 생산 규모는 31조원 수준으로 지난 5년간 연평균 5.3% 성장했다. 반도체 등 타 산업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는 있으나 여전히 글로벌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4%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2030년까지 연평균 8~9% 성장을 예상하고 있지만, 이는 정부의 일관된 지원과 규제 완화, 그리고 민간의 적극적 투자가 지속될 때만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런데 업계와 전문가들은 과학적 규제(regulatory science) 역량의 부족, 민간투자 생태계 미흡 등 구조적 장애요인을 지적하고 있다. 정부 정책의 불합리성도 발목을 잡는 요인이라는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바이오산업은 본질적으로 ‘안전성’과 ‘개발 속도’라는 상충하는 가치를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분야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되는 만큼 안전성과 신뢰가 최우선이지만, 동시에 급변하는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신속한 혁신과 상용화가 필수적이다. 이 두 가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것, 그것이 현재 한국 바이오산업이 직면한 핵심 과제다.
안전성 vs 개발 속도, 정책적 균형 필요
2019년 발생한 골관절염 유전자치료제 인보사(현재 TG-C) 사태는 국내 바이오산업에 대한 규제 방식의 전환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안전성 확보를 위해 과학적 접근이 아닌 법적 절차를 취함에 따라,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고 신속한 상용화가 늦어진 사례이기 때문이다.

당시 인보사의 미국 임상 3상 중 세포 기원 착오가 발견되었다. 한국 식약처는 즉시 허가를 취소하고 이를 개발한 국내 K사의 주요 임원들을 사법당국에 고발했다. 이후 재판이 4년 넘게 이어졌고, 2024년 11월 1심에서 전면 무죄가 선고되었다. 당시 재판부는 “(무죄판결이 확정된다면) 수년에 걸쳐 막대한 인원이 투입된 이 소송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 과학적 분야의 사법적 통제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이례적으로 판결문에 담았다.

미국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응은 우리와 달랐다. 2019년 5월, 스위스 제약사 노바티스의 척수성 근위축증(SMA) 유전자 치료제 졸겐스마(Zolgensma)가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그런데 승인 한 달 후, 제조사의 동물실험 데이터 조작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FDA는 승인을 취소하지 않았다. 대신 과학적 검토에 집중했다. 그 결과 제품의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고, 2019년 8월 공식 성명을 통해 “환자들에게 제품 사용을 중단할 이유가 없으며, 제품의 위험·편익 균형은 여전히 긍정적”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졸겐스마는 계속 시판되어 2024년까지 전 세계 4000명 이상의 SMA 환자를 치료했다. 연간 매출은 2023년 12억 1천만 달러(약 1조8천억원)에 달한다. FDA의 과학적 접근이 혁신 의약품의 환자 접근성을 보장한 것이다. TG-C 역시 미국에서는 2020년 임상 재개 승인을 받아 2024년까지 1066명 환자 등록을 완료하고 2027년 허가를 목표로 임상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생산·개발이 중단된 상태다.
한국 바이오산업 정책의 문제: 규제의 경직성
위 두 사례를 비교하면 한국 바이오산업 정책의 문제를 엿볼 수 있다. 우선 규제의 경직성이다. 한국 식약처는 포지티브 규제(positive regulation) 방식을 취한다. ‘이것 빼고는 하지 말라’는 방식이다. 하지만 혁신적인 신약 개발에는 네거티브 규제(negative regulation) 방식, 즉 ‘이것 빼고는 다 할 수 있다’는 접근이 훨씬 적합하다. 특히 세포·유전자치료제처럼 기존 법 제도로 규제하기 어려운 혁신 기술의 경우, 경직된 규제는 적시 제품화를 막는 장벽이 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규제과학(regulatory science) 역량의 부족이다. 첨단 바이오 제품의 유효성과 안전성을 과학적으로 평가할 전문인력과 시스템이 충분하지 않다. TG-C 사례에서 보듯, 세포 기원 착오가 실제 안전성과 효과성에 미치는 영향을 과학적으로 판단하는 대신 즉각 허가 취소와 형사 고발로 이어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과학적이고 유연한 규제, 투자 생태계 활성화 필요
우선, 과학 중심의 유연한 규제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첨단 바이오 제품의 유효성·안전성 평가기술을 개발하고, 허가 심사인력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 신속 허가(fast track)와 조건부 승인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사후 모니터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혁신 바이오 기술에 대한 ‘규제 샌드박스’ 확대도 필요하다. 세계 최초(first-in-class) 신약의 경우 기존 규제 틀에 맞추기 어렵다. 일정 기간 규제 유예를 허용하되 엄격한 모니터링 하에 안전성 데이터를 축적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투자 생태계 활성화도 긴요하다.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는 좋은 출발점이다. 바이오 분야 투자 규모를 최대한 늘리고 바이오 전문 펀드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가장 비용이 크고 실패 확률이 높은 임상 3상 특화펀드를 조성하는 것도 필요하다. 정부가 손실위험을 먼저 부담하는 방식으로 민간의 투자 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은 기본이다.

범부처 통합 거버넌스도 시급하다. 바이오산업은 산업부(산업 육성), 복지부(의약품 규제·보험), 과기부(R&D), 중기부(벤처 지원) 등 여러 부처가 관여한다. 이들을 통합 조정할 컨트롤타워가 없으면 정책이 분산되고 중복된다. 현재 운영 중인 ‘바이오헬스 혁신위원회’가 컨트롤 타워로써 산·학·연·병·정 간 협력을 강화하고, 범부처 통합 전략을 수립·집행할 권한을 갖는 것도 방법이다. 바이오산업은 10년 이상 장기 투자가 필요한 만큼,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안전성과 개발 속도의 균형을 찾아서
국내 K사의 TG-C와 스위스 노바티스의 졸겐스마, 두 사례는 명확한 교훈을 준다. 바이오 신약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과학적 접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재판부가 던진 화두, ‘과학적 분야의 사법적 통제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미국 FDA가 졸겐스마 사례에서 보여준 것처럼, 데이터 조작이라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과학적 검증을 통해 제품의 안전성과 효과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졸겐스마가 전 세계 4000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며 연간 1조 80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동안, 한국 TG-C는 여전히 생산·개발이 전면 중단된 상태다

정부는 2030년까지 블록버스터 신약 3개 이상 배출 및 글로벌 수준의 제약·바이오 기업 5개 육성을 목표로 제시했다. 이를 달성하려면 TG-C 사례를 교훈 삼아 근본적인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규제는 과학 중심으로 유연하게, 투자는 민관이 함께 지속적으로, 인프라는 생산부터 상업화까지 통합적으로, 거버넌스는 범부처 통합으로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

바이오산업은 더 이상 ‘가능성의 산업’이 아니다. 국가가 책임 있게 관리하고 국민이 성과를 누려야 할 핵심 전략산업이다. 안전성과 속도, 신뢰와 혁신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지혜가 절실하고, 과학적 규제 역량과 전문인력 양성이 시급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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