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 명절을 앞두고 차례상을 바라보는 소비자들의 기준이 뚜렷하게 달라지고 있다. 상을 얼마나 풍성하게 차릴지가 아니라, 차례를 지낼지 여부부터 비용과 가짓수까지 ‘선별적으로 결정하는’ 흐름이 확산되는 모습이다. 차례상 간소화가 새로운 명절 소비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29일 농촌진흥청이 수도권 소비자 패널 1000명 대상으로 실시한 '설 명절 농식품 구매 행태 조사'에 따르면, 올해 설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 답한 가정은 63.9%로 전년 대비 12.4%포인트(P) 증가했다. 차례를 지내지 않는 선택이 더 이상 일부 가구의 예외적인 결정이 아니라, 수도권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차례를 지낸다고 응답한 가구 역시 준비 방식은 달라지고 있다. 음식 수와 양을 줄이거나, 조리 부담이 큰 전·떡류 등을 중심으로 반조리·완제품을 구매하겠다는 응답이 다수를 차지했다. 차례는 유지하되, 노동과 비용은 최소화하겠다는 '선택적 간소화' 전략이 뚜렷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가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40% 이상은 차례 문화에서 가장 시급한 개선 과제로 '차례상 간소화'를 꼽았다. 적정 음식 가짓수로는 '5~10가지'가 49.8%로 가장 많았다. 과거처럼 20가지가 넘는 음식을 상에 올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차례의 형식보다 실질을 중시하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용에 대한 기준도 분명해졌다. 차례를 지낼 때 가장 적당한 비용으로는 '10만원대'를 선택한 응답자가 가장 많았고, '20만원대'까지 포함하면 전체 응답자의 81%가 차례상 비용을 20만원 이하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명절 상차림에서도 '적정선'이 뚜렷해진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흐름을 고물가 국면에서 나타난 '프라이스 디코딩(Price Decoding)' 소비 트렌드의 연장선으로 해석한다. 무조건 지출을 줄이기보다, 가격 대비 효용이 분명한 소비만 남기려는 경향이 명절 문화 전반으로 확산했다는 의미다. 불필요한 겉치레와 과도한 가짓수는 줄이고, 꼭 필요한 메뉴에만 합당한 비용을 쓰겠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는 설명이다.
소비자 체감도도 비슷하다. 서울에 거주하는 30대 직장인 이모씨는 "차례를 아예 안 지내거나 간단히 하자는 이야기가 가족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나온다"며 "먹지 않을 음식을 상에 올리는 건 부담"이라고 말했다.

50대 맞벌이 직장인 고모씨 역시 "요즘은 차례를 지낸다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친척들이 모이지 않는다"며 "물가 부담도 커져 예전처럼 상다리가 휘어지는 차례상을 준비하기 버겁다. 8인 기준으로 30만~40만원을 넘기지 않으려 한다"고 털어놨다.
유통업계는 이러한 변화를 일시적인 소비 위축이 아닌 명절 문화 자체의 구조적 전환으로 보고 있다. 박종철 집반찬연구소 대표는 "최근 명절 트렌드는 '간소화된 차례상'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며 "관습적인 명절 문화가 실리 중심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번 설이 '얼마나 많이 차렸느냐'보다 '얼마나 합리적으로 차렸느냐'를 중시하는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정부 역시 설 명절을 앞두고 장바구니 부담 완화에 나섰다. 정부는 설 성수품 공급량을 역대 최대 수준인 27만t으로 확대하고, 농·축·수산물 할인 지원에 910억원을 투입한다. 16대 설 성수품 공급 규모는 평시 대비 1.5배 수준으로, 배추·무·사과·배 등 주요 품목은 계약재배와 비축 물량을 활용해 공급을 늘린다.
정부는 대형마트와 중소형 마트, 온라인 유통채널을 통해 주요 성수품을 최대 50% 할인 판매하도록 지원할 방침이다. 다만 소비 기준이 변화하는 만큼 가격 안정 대책만으로는 명절 풍경을 되돌리기 어려울 전망이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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