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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를 쓰레기통에 처박을 용기..."'누벨바그'에 올라타 '네 멋대로 해라'"

입력 2026-02-03 17:31   수정 2026-02-03 17:32



“천재는 재능이 아니라 절박한 상호작용의 결과야.” 서른 살의 장뤽 고다르는 사르트르의 한마디를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듣도 보도 못한’ 초짜 감독이 내뱉는 말이라기엔 너무 심오했다. 영화도 제대로 찍지도 않고 있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그를 마주한 거의 모든 사람은 ‘씨네필이랍시고 기행이나 일삼는 괴짜가 늘어놓는 허풍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웬걸. 절박한 천재가 만든 파격의 문법은 60년이 훌쩍 지나 쇠락의 기로에 선 우리 영화 산업의 유일한 생존 본능이 됐다.

“Sic transit gloria mundi”. 이 로마 격언은 지난 수백 년간 교황의 즉위식에서 울려 퍼졌다. 뜻은 이렇다. “이렇게 세상의 영화(榮華)가 사라지는구나.” 운명이라는 건 원래 고약하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고, 앞물결은 뒷물결에 의해 밀려나간다. 고된 오르막길을 거쳐 정상에 오르는 순간 내리막길을 걷는 게 세상의 이치다.

영화(榮華)를 영화(映?, Cinema)로 바꿔보면 어떨까. 얄궂게도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한때 대중예술의 대명사였던 영화는 내리막길에 섰다. 천만 관객의 환호는 팬데믹과 OTT 알고리즘에 밀려 공허한 메아리만 남았다. 투자가 얼어붙고 영화 제작 편수가 급감했다는 말조차도 이젠 식상하다. 국내 주요 배급사가 올해 개봉을 예정한 상업영화는 22편. 팬데믹 이전과 비교해 절반 남짓에 불과하다.



‘극장 영화 관람’ 수요가 줄어드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 자체가 따지고 보면 경제적이지 않다. 영화 한 편을 보려면 1만원이 훌쩍 넘는 표를 예매해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극장으로 가야 하며, 좁은 좌석에 안면도 없는 불특정 다수와 부대껴야 한다. 중간에 화장실 한번 다녀오기 쉽지 않을뿐더러, 떡볶이나 라면 냄새를 풍기고 스마트폰 벨소리가 난무하는 ‘관크’를 견뎌야 한다. 온갖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은 조금씩 소수 시네필의 고상한 취미로 바뀌고 있다.

돌이켜보면 예술의 역사는 대체와 소멸의 반복이었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가 세상에 내놓을 무렵의 보드빌, 오페레타, 연극이 처지가 지금의 영화와 비슷했다. 하지만 구시대의 예술이라 해서 멸종을 언도받는 것은 아니다.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연극을 보고 오페라를 즐긴다. 대중성을 새 예술에 맡기고 예술의 본질을 파고들며 생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디에서 살길을 찾아야 하는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신작 ‘누벨바그’와 4K로 돌아온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가 만나는 지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섹시한 필름 누아르? 난 지적 무질서를 지향한다”

영화가 살길을 찾아야 한다면, 어쩌면 이정표는 ‘창조적 파괴’에 있을지 모른다. 60여 년 전 프랑스 파리는 바로 그런 장소였다. ‘누벨바그(Nouvelle Vague)’라는 이름 자체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의 거창한 이름은 기존의 것을 거부하고 싶을 때 가장 편하게 붙일 만한 작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이끈 1900년대 초반 오스트리아의 회화 경향인 ‘빈 분리파’가 “각 시대에는 그 시대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을 외친 것처럼 젊고 반항적인, 꿈 많은 예술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입에 담아볼 법한 말이다. 중요한 것은 어디가 어떻게, 왜 고여 있길래 새로운 물결을 필요로 했느냐라는 맥락이다.



누벨바그 기수들의 문제의식이 움트던 때 프랑스 영화의 형편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유럽이 재건되며 영화 산업도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제작은 활발했고, 관객은 가득했다. 그 풍요는 독이 됐다. 당시 프랑스 영화계는 설계된 각본대로 찍어내는 이른바 ‘품질의 영화(Tradition of Quality)’에 안주하고 있었다. 봇물 터지듯 할리우드식 영화들이 쏟아지는 와중에 오래된 고전 문학작품을 보기 좋게 스크린으로 옮겨왔다. 그 시기 나온 작품들은 섹시한 필름 누아르로, 감독들은 잘나가는 거장 대접을 받았다.

겉으로는 만사형통이라도 속은 곪아가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찍어낸 영화는 예술의 본질인 도전과 창의성이 결여돼 있었기 때문이다. 삽화를 미술사의 중요한 작품으로 여기지 않듯,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 같은 영화는 구경거리는 될지언정, 예술이 될 순 없었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당신들은 당신들의 영화를 갖고 무덤에나 가라”고 비판한다. 모두가 걸작이라 칭찬하는 영화를 보고 나온 고다르가 동료인 트뤼포와 수잔 쉬프만, 클로드 샤브롤에게 “확실해. 모든 문명은 망해”라고 하자 나머지 셋이 “영화도”라고 입을 모으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누벨바그가 내세운 대안은 명확했다. 감독이 시나리오의 노예가 아닌, 카메라라는 만년필로 자신의 세상을 직접 써내려가는 작가여야 한다는 것. 이 기상천외하고 불온한 상상력이 폭발했을 때가 바로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를 세상에 선보였을 때다. “탄탄한 내용에 사실적이고 섹시한 필름 누아르면 돼요”라는 투자자의 한마디에 그는 답한다. “나는 감독으로서 지적, 도덕적 무질서를 지향해요”



쓰레기통에 처박힌 시나리오

링클레이터의 ‘누벨바그’는 이런 고다르가 ‘네 멋대로를 해라’를 촬영하던 전설적인 며칠 간의 시간을 다룬다. 영화 속 고다르는 얼핏 보면 사회부적응자에 가깝다. 뭐 하나 이룬 것도 없이 남의 성취에 불평이나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링클레이터는 이 점을 조금 더 부각한다. 고다르의 괴팍한 성격을 예술의 본질에 집중하는 태도로 치환한다. 영화 속 고다르는 오만하고 예민한 서툰 청년이다. 지폐 몇 푼을 훔칠 정도로 사정이 어려우면서도 한 가닥 하는 선배들의 조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치기 어린 열정’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링클레이터는 누벨바그가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돈도 없고 ‘빽’도 없이 영화예술에만 몰두하는 청춘들이 카메라 하나 들고 거리로 나가는 태도에서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고다르는 늘 자신이 준비된 영화감독이라고 말한다. 현실은 투자를 받지 못해 스물 다섯이 될 때까지 장편영화 연출은 커녕 평론이나 하는 신세지만, 늘 완벽한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발 앞서 인정받은 트뤼포와 샤브롤과 격차가 벌어진다는 조바심이 나던 때, 고다르는 영화 제작자인 ‘보보’ 조르주 드 보르가르에게 장편 데뷔작 투자를 약속 받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잘나가는 배우 진 시버그를 섭외해놓고선 다음 장면을 묻는 질문에 “나도 모른다”며 담배나 태울 뿐이다. 촬영은 즉석에서 쓰여진 대사들로 채워지고 애드리브가 여기저기 난무한다. 심지어 같은 장면에서 배우의 입고 있는 옷이 다른 문제가 생기는데 “갈아입을 수도 있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정도다. 촬영 기간이 끝나가는데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오늘 촬영은 없다"며 팀을 해산시키기도 한다. 촬영이 임박해 쓰던 시나리오를 별안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사라지기도 한다. 고다르의 ‘대책 없는 청춘’의 객기는 현장과 충돌을 일으키고 화가 난 투자자 보보는 주먹까지 휘두르며 길길이 날뛴다. 하지만 고다르는 “천재는 재능이 아니라 절박한 상호작용의 결과”라며 굽히지 않는다.



링클레이터가 연출한 일련의 이야기들은 어쩌면 ‘품질의 영화’를 향한 누벨바그의 통쾌한 복수극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영화는 아수라장 같은 고다르의 촬영 현장을 통해 누벨바그의 정체성을 증명한다. 규격화된 조명도, 통제된 세트따위도 필요 없다. 파리의 길거리를 그 자체로 하나의 스튜디오로 쓰기 때문이다. 고다르가 짐수레에 카메라를 실어 내달리고, 편집실에선 필름을 제멋대로 잘라내는 ‘점프 컷’이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무질서한 파괴가 일군 불멸의 고전

링클레이터의 ‘누벨바그’가 생중계하는 아수라장을 거쳐 도착한 종착역은 지난 14일 재개봉한 ‘네 멋대로 해라’다. 영화는 실존했던 범죄 사건에서 영감받았지만, 서사의 기승전결은 도통 관심이 없다. 경찰을 죽이고 파리로 숨어든 미셸과 신문팔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미국인 유학생 파트리샤가 정처 없이 헤메는 거리를 뒤쫓을 뿐이다. 한 장면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툭 끊어버리는 불친절한 편집의 점프컷은 당혹감의 절정이다. 하지만 이 무의미해 보이는 파괴가 역설적으로 영화를 문학의 삽화에서 해방시켰다.

시네필이라 자부한다면 이미 ‘네 멋대로 해라’를 알겠지만, 처음 고다르가 일으킨 물결에 몸을 맡기는 관객이라면 ‘누벨바그’를 먼저 관람한 뒤 원작으로 향해도 좋다. 링클레이터가 유머러스하게 복원해낸 촬영장의 활극을 보고 나면, 고다르의 난해한 실험이 사실은 얼마나 뜨겁고 절박한 상호작용의 결과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 ‘영화는 어디에서 살길을 찾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보자. 관성적인 영화만 찍어내던 1950년대 프랑스 영화계의 풍요로운 권태는 팬데믹 이전 관성적인 흥행 공식과 홍보 문법에 저당 잡혔던 한국 영화 산업과 묘하게 닮았다. 그래도 희망의 전조는 감지된다. 큰 자본이 투입되는 상업 영화들이 주춤하는 새, 무질서한 파괴를 꿈꾸는 독립·예술영화들이 의미있는 성취를 거두고 있어서다.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 역대 최다인 1805편의 작품이 접수되고, 박스오피스에서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 연상호 감독의 ‘얼굴’ 등이 저예산의 한계를 뚫고 관객의 지지를 얻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60여년 전 파리의 청년들이 그랬듯, 한국 영화도 낡은 시나리오를 쓰레기통에 처박을 용기를 내야 할 때가 아닐까.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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