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처 속에서도 창작은 기어이 꽃을 피운다. 전쟁 통에 고향을 뒤로 할 수밖에 없었던 두 작가. 흘러간 과거보다 아직 오지 않은 저 너머의 세계를 궁금해한 두 여성. 레바논과 한국, 국적은 달라도 예술을 향한 굳건한 의지는 같았던 두 작가의 이야기가 서울에 당도했다.
두 작가 관통한 상실과 그리움
시대를 초월한 두 작가의 대화가 시작됐다. 서울 강남구 화이트큐브에서 열린 ‘태양을 만나다(To meet the sun)’를 통해서다. 레바논 출신의 시인이자 작가 에텔 아드난(Etel Adnan)과 재불 1세대 추상화가 이성자의 작품을 함께 소개하는 2인전이다. 아드난의 작품은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에 처음 소개된다. 두 작가가 활동하던 시기는 비슷하지만,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은 50년의 격차가 있다. 이성자 작가의 작품은 1960년대, 에텔 아드난의 작품은 2010년대 작업한 것이다. 하지만 전시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두 작가의 작품은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 모습이다. 작업 연도도, 사는 곳도 다르지만 마치 시공간을 초월해 대화를 나눈 듯 상당 부분에서 공통점을 공유한다.


두 작가가 걸어온 인생에도 비슷한 지점이 있다. 이 둘은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다. 성인이 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독보적인 자신들만의 추상 언어를 발전시켜나갔다. 모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디아스포라적 배경도 같다.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아드난은 1977년 레바논 내전의 참상을 다룬 소설 ‘시팅 마리 로즈(Sitt Marie Rose)’로 아랍 현대 문학의 거장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이 소설로 인해 양측 정파로부터 살해 협박과 위협을 받게 되면서 끝내 프랑스 파리로의 망명을 택한다. 이성자가 정착한 곳 역시 파리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게 됐지만, 부계 중심의 당시 한국 사회에서 세 아들의 양육권을 빼앗긴 이성자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만이 세 아들과 본인을 지키는 길이라 여겼다. 당시 한국 사회 분위기 상 이혼녀라는 주홍글씨를 새긴 채로는 아이들을 다시 찾아올만큼의 지위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절망과 상실감을 안은 채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작가는 반 세기동안 무려 4000여점의 작품을 남길만큼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붓질 한 번 하면서 이건 우리 아이들 밥 한술 떠 먹이는 것이고, 붓질 한 번 더 하면서 이건 우리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라고 여기며 그렸다”는 생전 작가의 말처럼 그는 씨를 뿌리듯 캔버스에 물감을 입혔고, 밭을 갈듯이 점과 선을 그으며 모정으로 붓질을 이어갔다.

아드난은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안은 채 살았다. 미국 캘리포니아와 파리를 오가며 망명 생활을 한 작가에게 자신의 뿌리가 시작된 곳은 마치 꿈처럼, 매일 꾸지만 닿을 수 없는 세계와도 같았다. 프랑스어, 영어, 그리스어, 터키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그지만 정작 아랍어는 하지 못한다는 점 또한 그에게 해소되지 않을 감정을 남겼다. 모국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캔버스에 옮겼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캘리포니아주 타말파이스 산은 작가의 작업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고 그린 것이지만, 어렴풋한 기억 속 고향을 떠올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고향은 내 몸에 새겨진 지도와 같다”고 말한 그는 타말파이스 산의 능선을 눈으로 훑으며 고국의 선과 색을 떠올렸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태피스트리(Tapestry) 작업 역시 레바논에서의 기억이 모티브가 됐다. 전시를 기획한 수잔 메이 화이트큐브 글로벌 아트 디렉터는 “작가가 어린 시절 자란 레바논의 집은 벽에 걸린 그림보다 카페트나 여기저기 걸린 직조물이 더 익숙한 풍경이었다”며 “1960년대부터 태피스트리 작업을 시작하려 했지만 비용 문제로 드로잉만을 남겨두었다가 2000년대 들어서부터 프랑스의 유서 깊은 태피스트리 명가 팽통(Pinton)과 협업해 작품을 선보일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우주 저 너머 향한 호기심
두 작가가 활동하던 1960년대는 우주에 대한 뜨거운 관심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처음으로 우주에 간 지구인, 지구라는 작은 점 하나로 묶인 세계, 미지의 공간을 향한 호기심과 상상력은 두 작가의 창작 활동에 동력으로 작용했다. 전시 제목 '태양을 만나다(To meet the sun)'는 인류 최초로 달에 간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을 기리는 아드난의 시에서 따 온 구절이다. 우주로까지 확장된 상상력은 아드난의 글쓰기에 영감을 주었고, 회화와 태피스트리에서는 천체 형상이 점차 두드러져 나타났다. 태양과 달을 연상시키는 원형과 공중에 떠 있는 사각형, 응축된 색면과 간결한 지평선의 띠 등이 반복해 등장한다.


이성자의 작품도 초기 대지와 동양의 음양을 주제로 하던 것에서 발전해 행성의 형상같은 원과 반원 형태, 우주의 푸른색, 은색 등 다채로운 빛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무렵 이후 작가는 1995년부터 2008년에 걸쳐 전개될 ‘우주 시대’ 연작으로 이어지는 개념적 기반을 구축해 나간다.
마치 상공에서 너른 들판을 내려다본 듯 선과 색으로 구성된 이성자 작가의 작품은 아드난의 태피스트리 작업에서 나타나는 직조감과 유사한 분위기를 풍기며 조응한다. 수잔 메이 디렉터는 “붓 한 놀림 한 놀림을 쌓아 올려 작업하는 이성자 작가와 한 땀 한 땀 집중해 태피스트리를 만들던 아드난 작가의 행위가 궤를 같이 한다”며 “작품 세계를 통해 두 여성 모두 인간과 세상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호기심 많은 아티스트였다는 점도 유추해볼 수 있다”고 전했다.
5개 국어를 하지만 모국어는 하지 못한 시인, 세 아들을 두고 떠나야만 살 수 있었던 화가. 세상이 아무리 그들을 절박한 상황으로 밀어붙여도 더 큰 세상을 향한 애정을 잃지 않았던 두 사람. 주저앉기보다는 고개를 들어 우주와 별을 바라보며 걸어 나간 여성들이 남긴 대화는 보는 이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전시는 3월 7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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