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속가능성(ESG) 공시를 자본시장법상 법정공시로 의무화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국제 기준과의 정합성·공시 인프라 구축·기업 부담과 책임 범위를 어떻게 설계할지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즉, 어떤 기준을 언제, 어디에, 어떻게 공시할 것인가의 문제다.
지속가능성 공시 입법화를 주도하고 있는 민병덕 의원실과 사단법인 지속가능성인증포럼은 5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지속가능성 공시 입법화와 정책 동향’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민병덕 의원실이 준비 중인 지속가능성 공시 법안을 바탕으로 주요 이해관계자들의 치열한 논의가 이어졌다.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시장을 바꿀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는 기대 속에 250명 이상이 참석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규정 중심 공시냐, 원칙 중심 공시냐
첫 번째 발제에 나선 정순섭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세계적으로 지속가능성 공시는 자본시장법 체계 내에서 법정공시로 의무화하는 추세”라며 “법정 공시라는 점에서 어디에 공시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민병덕 의원실 안은 사업보고서(정기공시) 공시사항에 포함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법정공시로 할 경우 상당히 강한 실효성 확보 수단이 적용되기 때문에 책임 감경과 관련해 일부 조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규정 중심 체계(rule-based approach)로 갈지, 원칙 중심 체계(principle-based approach)로 갈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며 “현재 민병덕 의원실은 원칙 중심 기준을 지향하고, 세부적인 내용은 시행령에 위임하는 형태로 설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시행 시기와 관련해 그는 “공포 후 4년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시행령으로 정한 날에 시행하는 방안을 고려했다”며 “일정 규모 이상의 상장법인에게 지속가능성보고서 제출 의무를 부과하고, 제출 대상, 시기, 공시 기준 및 절차는 시행령에 위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공시는 투자자에게는 새로운 정보이자 정책적으로는 새로운 규제 수단이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비용”이라며 “기업이 부담하는 비용은 단순한 작성 비용을 넘어 법적 책임과 소송 위험까지 포함되기 때문에 투자자뿐 아니라 발행인·금융시장·국가경제 관점에서 비용과 편익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제도 시행 후 3년간 민사·형사·행정법상 책임 모두 면책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책임 감경의 경우 어느 정도 기간까지 책임을 완화할 것인지, 명백한 고의가 있는 경우에도 감경할 것인지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 발제에 나선 김혜성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각국의 지속가능성 공시 도입 현황을 설명했다. 김 변호사는 “현재 IFRS 재단의 S1·S2 기준을 전면 채택한 국가는 16개국, 이를 자국화해 적용하는 국가는 15개국 정도”라며 “법제화를 마친 국가들은 주로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하지만, 비상장기업에도 의무를 부과하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스코프3 의무화와 관련해 그는 “호주는 자산 규모를 기준으로 적용 대상을 정하고, 싱가포르는 3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있으며, 영국은 스튜어드십 코드에 기반한 ‘준수 또는 설명(comply or explain)’ 방식을 택하고 있다”며 “미국 캘리포니아주 역시 일정 기간 유예를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시 검증과 관련해서는 “제한적 검증에서 합리적 검증으로 강화되는 추세이며, 검증기관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발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변호사는 “한국도 로드맵을 통해 ‘대기업부터 의무화 → 거래소 공시 중심 → 법정공시 전환’과 같은 방향이 논의되고 있다”며 “공시 대상(예: 자산 2조원 이상), 적용 시점(2028년 전후), 스코프3 유예 여부, 검증 의무화, 중복 공시 개선 등 제도적 정비가 제도 설계의 핵심 변수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이후 김동수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가 좌장을 맡은 토론에서는 공시 제도가 현실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설계 방안에 논의가 집중됐다.
권성식 한국표준협회 ESG경영센터장은 “보고서 작성 이후 데이터만 사후 검증하는 방식은 공시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며 CSRD처럼 중대성 평가 등 사전 프로세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대기업 공시가 강화될수록 협력사까지 데이터 요구가 확산될 수밖에 없다”며 중소기업 지원 정책이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장에서는 지속가능성 보고서 작성 난도가 높고, 담당자의 조직 내 위상도 낮다는 목소리가 있다”며 “제도 도입이 기업을 압박하는 수단이 아니라 투자자 판단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방향이어야 기업 내부의 동력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김춘 한국상장사협의회 본부장은 “기업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비용보다 불확실성”이라며 “지속가능성 공시는 재무정보와 달리 연결·밸류체인 전반으로 범위가 확장되기 때문에 책임 구조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모회사가 종속회사 및 협력사 데이터를 취합해 공시할 경우, 데이터 신뢰성 확인 수준, 오류 발생 시 책임 귀속(모회사 또는 개별회사), 내부통제와 이사회 승인 등 거버넌스 체계를 법과 기준, 가이던스로 정리해야 기업이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웅희 한국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 위원은 ISSB 기반 기준이 원칙 중심일 수밖에 없고, 지속가능성 정보에는 추정·예측 정보와 제3자(공급망)로부터 수집한 통제 불가능 정보가 많다는 점을 짚었다. 그는 “재무정보보다 불확실성이 큰 만큼 단순한 ‘면책 vs 비면책’이 아니라 정보 유형별로 세이프하버(면책·책임완화)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처럼 스코프3에 대해 합리적인 사유가 있는 경우 제재를 완화하는 방식이나, 초기 일정 기간 민사·행정·형사 책임을 어떻게 조합할지 등이 주요 논쟁 지점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종오 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총장은 국내 도입 지연의 원인으로 업계 반대와 현실성 논쟁을 꼽으며 “2029년 의무화는 너무 늦다”고 지적했다. 그는 “EU 역외 규제가 본격화되면 2029년은 ‘슬로우 팔로어’가 될 수 있다”며 2028년을 기본으로 하되 2027년으로 앞당길 필요성도 제기했다. “기업들이 CDP, TCFD 등을 통해 이미 기후 공시를 연습해왔고, 일부 대기업부터 시작하는 것도 가능하다”며 “못할 일이 아니라 서둘러야 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조영준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원장은 일본 사례를 언급하며 준비된 기업부터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공시 시점도 사업보고서 시즌과 정합성을 맞추며, 인증 역시 제한적 검증에서 합리적 검증으로 단계적으로 강화하는 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하자, 말자의 문제가 아니라 이행 가능한 제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지원 금융위원회 사무관은 “정부는 로드맵 초안 공개를 준비 중이며, 공시와 지원을 함께 추진한다는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특히 스코프3는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중견기업에도 부담이 크고 실측 데이터 요구가 확산될 수 있어 주요국 동향을 참고해 대상·시기·유예를 설계하겠다고 설명했다.
이날 토론에서는 국제 기준과의 정합성과 공시 신뢰성 확보의 중요성에는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됐다. 반면 공시 대상 규모(2조원 vs 3조원 등), 공시 채널(거래소 공시 후 법정공시 전환 여부), 스코프3 유예 기간, 검증 단계, 원칙 중심 기준에 맞춘 면책 조항(세이프하버) 등 실무 설계 쟁점에서는 이해관계자 간 온도 차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구현화 기자 ku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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