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시 한 편이 낭송되는 이곳은 맨해튼의 아치형 회랑이 아니다. 종로에 자리한 감성 짙은 공간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인 여국현. 시인이 낭송하는 시는 고두현 시인의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역자 여국현이 직접 낭독한 덕분인지 시의 섬세한 뉘앙스와 음악성이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전달된다.

2024년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번역의 중요성이 새삼 주목받았다. 정작 드러난 것은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릴 번역 현장의 척박한 현실이었다. 한국문학번역원 기준으로, 외국어로 번역해 출간하는 한국문학 도서는 매년 200여 권 정도에 불과하다. 2025년까지 누적 출간된 2900여 권 역시 한정된 자원 속에서 이룬 성과다. 필요성에 비해 지원이 적다 보니 한국문학을 해외에 소개할 때 번역 없이 단순히 저작권을 판매하는 구조로 진행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 한국문학의 정서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고 담보하기 어렵다.
어려운 국내 출판 상황을 타개할 마지막 돌파구로 해외 시장을 꼽는 의견도 있다. 작가들이 창작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안전망이자 해외 진출의 교두보로서 번역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 지난 2월 7일 열린 『한국 현대 서정시』 출간 기념 북콘서트는 더욱 뜻깊다. 이 책에는 한국어와 영어로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시인 36명의 시 72편이 수록됐다. 출발 언어는 한국어이고 도착 언어는 영어다. 이 시집은 한국을 넘어 영어 문화권을 향한다. 영문 제목은 『Contemporary Korean Lyric Poems』다.

여국현 시인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 데는 문학평론가 오민석 단국대 명예교수의 축사도 한몫했다. 오 교수는 이미 추천사에서 “가장 적절한 번역자가 가장 적절한 시인들의 작품을 영어로 옮긴 역서”, “하모니카 두 겹의 바람구멍처럼 이중 언어의 시가 가슴을 아름답고 시원하게 적셔줄 것” “한글과 영역본을 대조해 따라 읽다 보면 현 단계 한국 시문학의 굵은 뼈대가 느껴질 것”이라는 평을 남긴 바 있다. 이날 역시 한국어와 영어 사이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시 번역이 쉽지 않음을 전제하며, 시인이자 영문학자인 여국현 박사가 가장 적절한 번역자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서평가이자 작가인 김미옥 씨는 “많은 시인이 독자에게 제대로 노출되지 못하고 있다”며, 여러 언어로 번역돼 유럽과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은 리스트의 레노레(Lenore) 원작자가 독일 시인 고트프리트 아우구스트 뷔르거였다는 사실을 환기했다. 시가 누구를 만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자 여국현을 통해 시가 새롭게 독자에게 다가가게 된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이 시집에 실린 작품들은 여국현 시인이 2022년 3월부터 2025년 6월까지 웹 매거진 《시인뉴스포엠》의 〈여국현 시인의 우리 시를 영시로〉라는 칼럼을 통해 번역·게재해 온 시들이다. 이번 시집은 그가 현대 한국시를 영어로 옮긴 다섯 번째 주요 프로젝트로, 앞서 출간한 『박인환 시선집』(2021), 『임보 시인의 산상문답』(2022), 박소원 시인의 『아, 아』(2024), 그리고 아직 출간되지 않은 정지원의 시조 사진집에 이어지는 작업이다. 그는 한국어의 결을 살리면서도 영어권 독자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번역을 위해 꾸준히 힘써 왔다.

이어진 낭독 시간에는 재능시낭송협회장인 김경복 낭송가가 여국현 시인의 〈안개〉를, 김선순 시인·시낭송가는 고영민 시인의 〈봄의 정치〉를, 최대남 시인·시낭송가는 나종영 시인의 〈물염(勿染)의 시〉를, 허향숙 시인·시낭송가는 정한용 시인의 〈언젠가 우리 다시〉와 고(故) 주영국 시인의 〈그리운 단비〉를 낭독했다. 마지막으로 한영본의 의미를 살려 고두현 시인이 자신의 시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를 낭독했고, 여국현 시인이 영시 낭독을 이어가며 무대를 마무리했다.


36명의 저자 중 고두현, 여연, 장우원, 정한용, 허향숙 시인이 참석했으며, 민족문화연구회 소속 강태승, 권순자, 김종숙, 김흥기, 윤재훈(이모작뉴스 기자), 이철경 시인과 우리시 필진 양훈식 박사, 우리시 회원 김미외, 김종욱 시인도 함께했다. 독자로는 고승규, 박미정, 박은경, 박중혁, 손미향, 이명숙, 이창수 님이 자리했다.

이 밖에도 방송대 학보 편집장 최익현, 김선향, 이수경, 고향갑 작가 등이 출간을 축하하며 한마디씩을 보탰다. 그 말들은 추운 겨울날의 공간을 온돌방처럼 데워줬다.

전 MBC 라디오 PD 조정선은 노련미가 느껴지는 팝송과 가요로 북콘서트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고, ‘권양우의 낭독 사랑방’ 권양우 사회자의 안정적인 진행으로 참석자 모두가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변화는 위대한 개인이 스스로 밀고 가는 힘에서 비롯된다고 착각하기 쉽다. 사람 자체보다 그가 서 있는 자리와 역할이 중요하다. 그 자리는 사회적 힘이 충돌하는 곳이며, 때로는 불모의 땅에서 밀알이 돼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 자리에서 여국현 시인은 말했다.
“한국 시를 세계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알리는 노력을 이어가겠습니다.”
이날 그는 외롭지만, 외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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