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요? 진짜요?” 이런 반응은 예상 시나리오에 없었다. 한국 영화사의 명장면을 만들어온 영화감독 류승완에게 데뷔 30주년을 맞은 소감을 묻자 “모르고 있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저 계속 영화를 만들고, 할 수 있는 걸 해왔다고.
류승완(53) 감독의 30년은 여러 수식어와 함께한다. 액션 영화의 문법을 새로 쓴 ‘한국의 타란티노’, 초저예산 영화로 충무로를 뒤집어버린 ‘독학파 영화광’, B급 활극에서 시작해 블록버스터급 상업 영화로 진화한 ‘천만 감독’. 영화의 범주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와 확장을 추구해온 사람이어서일까. 지난달 11일 영화 '휴민트'가 개봉할 때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가 지승호 작가와 함께 쓴 인터뷰집 <재미의 조건>이었다.

영화와 책을 ‘동시 개봉’한 류승완 감독을 서울 암사동, 그의 영화 제작사인 외유내강 사무실에서 만났다. 영화가 개봉한 다음 날이었다.
책이 출간된 건 당연히 데뷔 30주년에 맞춘 행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류 감독은 손사래를 쳤다. “저는 숫자에 약해요. 기념일도 통 못 챙겨서 맨날 아내에게 혼나는데요.” 그와 배우자인 강혜정 대표는 2005년부터 함께 외유내강을 운영하고 있다.
영화는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일
영화를 만들며 숫자에만 매몰되지 않으려는 이유를 설명하던 그가 ‘태도’라는 단어를 꺼냈다. “외유내강 안에서 ‘상업 영화’란 단어는 금기어예요. 그 말을 쓰는 순간 우리의 모든 목적 자체가 박스 오피스의 숫자가 돼버려요. 영화를 만드는 우리는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훔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게 제 태도예요. 물론 많은 분이 영화를 봐주시면 좋죠. 하지만 당대엔 인정 못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되살아나는 영화가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는 거니까요.”
'휴민트'를 둘러싸고 극장가의 기대감과 불안감이 유난히 경합하는 건 한국 영화계가 위기에 빠져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극장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자 극장 대신 OTT 개봉을 택하는 작품들이 줄을 잇는다.
류 감독은 “코로나19 팬데믹 3년이 인류에게 비가역적인,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 같다”며 “영화 산업 측면에서는 극장 경험이 공백으로 남은 세대가 등장했다”고 했다. 책에는 이렇게 표현했다.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대학생이 되는 3년 동안 극장 경험이 사라졌다.” 이들에게 소구할 20대 스타가 실종됐고, 티켓값은 급상승했다. 미디어 환경이 손안에 있는 휴대폰으로 주도권을 넘겨주다 보니 개개인의 취향은 또렷해진 반면 보편적 정서라는 건 흐려지고 있다.

류승완 감독은 결국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게 본질적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극장에서 흥분되던 경험이 없는 세대에게 극장은 그저 불편한 공간일 수 있어요. 그렇다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 왜 특별한지를 증명하는 게 바로 이 시대 영화인의 숙제인 거죠.”
오늘날 영화 산업이 처한 위기의 기원이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본질을 바꿔놓는 거대한 흐름’이라면 묘수는 요원해 보인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일을 잘하자. 떠날 때가 왔을 때 너무 구질구질하게 버티지 말고 깔끔하게 떠나자. 이게 저의 생각이에요.”
류승완이 말하는 ‘명대사’의 조건
영화 제목이 된 ‘휴민트’는 사람을 통한 정보활동을 뜻한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쥐고 뒤흔들어야 살아남는다. 전투도, 영화도. 류 감독은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요”(영화 '부당거래') “어이가 없네?”(영화 '베테랑') 등 사람들의 공감대를 장악한 명대사를 다수 보유한 감독이다. 류 감독은 책에서 ‘좋은 영화’의 조건으로 “관객에게 최상의 경험을 주는 영화, 질문을 던지는 영화, 그리고 진짜가 느껴지는 영화”를 꼽았다. 재미, 철학, 몰입이라는 세 요소를 함축하는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명대사’다.
30년간 창작을 지속해오며 언어의 감각을 가다듬는 비결은 무엇일까. 요약하자면 취재, 채집, 조립이다. 류 감독은 “예전에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만들 때는 장풍협회까지 찾아갈 정도로 취재에 공을 들이는 편”이라며 “이번 영화에서 조 과장(조인성)이 헌법을 인용하는 대사는 실제 탈북자가 국정원 블랙 요원에게 듣고 마음이 움직였다는 일화를 듣고서 집에 돌아가자마자 각본에 넣은 것”이라고 말했다.

책 역시 훌륭한 자극제다. <FBI 행동의 심리학>에서 타인의 행동을 토대로 심리를 읽어내는 방법을 역으로 적용해 등장인물의 심리를 묘사할 적절한 행동을 찾아내기도 한다. 사무실 곳곳에는 무협 소설부터 만화책 ‘아기공룡’ 시리즈까지 수백 권의 책이 놓여 있었고, 류 감독의 방 역시 벽면 가득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물론 가운데에는 이소룡이 수련하던 것과 같은 영춘권 목인장이 자리했지만. 류 감독은 ‘인생 책’으로 알렉상드르 뒤마의 고전 복수극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꼽았다. 자신에게 이야기의 근원과 같은 소설이라고.
탈북자·뇌과학자·장풍협회도 찾아간다
그가 내놓은 <재미의 조건>은 용감한 책이다. 일단 형식부터 그렇다. 지 작가가 류 감독을 2023년부터 2025년 겨울까지 여러 차례 인터뷰한 뒤 그 내용을 류 감독의 시점에서 재구성해 정리한 것이다. 내용도 날것 그 자체다. 영화 '군함도'를 둘러싼 논란과 그 이후의 좌절까지 솔직하게 드러낸다. 패키지 계약 관행에 대한 비판 등 한국 영화계를 위한 쓴소리도 담았다.
인공지능(AI)의 공세에 대해 묻자, 창작자의 눈은 다시금 용기와 낙관으로 빛났다. “2023년에 강혜정 대표랑 CES에 갔는데, AI의 원년 같은 해였어요. 시나리오를 쓰면 어느 지역에서 어느 정도의 관객 반응이 있을지 수치화해 알려주는 기술을 보여주더라고요. 그때는 ‘도대체 영화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너무 충격을 받아 뇌과학자들을 직접 만나러 다니기도 했죠.”
그를 안심시킨 것도 AI였다. 첫 장면은 동일하고, 이후 전개는 뇌파를 분석해 개인별 맞춤형 이야기를 제공하는 AI 프로그램의 만족도가 그다지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뭔가 좋은 걸 보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존재인데, 그 욕구가 충족이 안 된 거죠. 그 실험 결과가 일을 해나가는 데 힘이 됐어요.”
영화는 관람뿐 아니라 제작 단계에서도 ‘관계의 예술’이다. 영화는 대규모 협업으로 만들어지고, 이는 시간 역시 영화에 투자되는 자본 중 하나라는 뜻이다. 외유내강이 신인 감독의 영화를 지속적으로 제작하고, 지난해부터 서울독립영화제를 후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즘 후배들을 보면 괜히 미안한 마음과 ‘참 힘들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요. 제가 영화를 처음 시작할 1990년대에 한국 영화는 무시당하고 여건이 참 어려웠어요. 그래도 우리 세대 감독들은 조금만 잘해도 응원을 받았고 비판에조차 애정이 담겨 있었죠. 그런데 21세기 관객은 시청각 정보의 경험치가 워낙 높잖아요. 영화계 진입 장벽이 높아지는 와중에 후배들을 품어줄 둥지가 무너지고 있으니까…. 저는 영화판에서 잘 놀았으니, 앞으로는 후배들이 더 잘 뛰어놀 수 있는 터를 닦아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호프집에서 술 먹어야 하는 나이에 놀이터에서 깽판 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류승완 감독은 이미 차기작 준비로 바빴다. 인터뷰를 마친 뒤에는 '베테랑 3' 각본을 고치러 간다고 했다. 방금 전까지 이번 영화 촬영 중에 담낭 결석의 고통을 참아내느라 혼자 숙소에서 울기도 하고, 물구나무서기까지 한 얘기를 했는데 말이다. 영화감독 17인이 각자의 데뷔 과정을 들려준 책 <데뷔의 순간>에서 과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쨌거나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해야 한다. 설령 안전한 것만 골라 시도하더라도 그냥 혼자 방구석에 앉아 고민만 하는 것보다 몇백 배 더 낫다. (…) 챔피언은 잘 때리는 사람이 아니라 잘 맞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구은서/유승목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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