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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막히자 구리·커피로 바꿨다… 다국적 기업의 '현물화 탈출' [글로벌 머니 X파일]

입력 2026-02-21 07:00   수정 2026-02-21 07:26

이 기사는 국내 최대 해외 투자정보 플랫폼 한경 글로벌마켓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최근 무역 거래 현지에 묶인 자금을 구리나 커피콩 등 원자재로 우회 회수하는 이른바 ‘현물화’ 전략이 다국적 기업의 생존법으로 부상하고 있다. 신흥국의 구조적인 달러 고갈이 임계점에 달하면서다.
글로벌 무역 35조 달러 돌파
21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교역(재화 및 서비스) 규모는 사상 처음으로 35조 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나 신흥국 외환 시장의 기능 상실로 다국적 기업이 해외에서 창출한 이익을 본국으로 송금하지 못하는 이른바 '트랩드 캐시(갇힌 현금)' 현상이 굳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랩드 캐시는 다국적 기업이 해외 현지 법인을 통해 합법적인 영업 활동으로 이익을 창출했지만 본사로 돈을 이체하거나 배당금 형태로 본국에 송금하지 못하고 장부상에 강제로 묶여 있는 자금을 뜻한다. 해당 국가의 극심한 외화(달러) 부족, 환율의 단기적 급변, 중앙은행의 강압적인 자본 유출 통제하면서다.

이런 유동성 마비는 달러 결제 의존도가 높은 항공업에서 선행 지표로 나타났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 따르면 전 세계 항공사들이 자본 통제로 회수하지 못한 억류 자금은 지난 10월 기준 12억 달러에 달했다. 이 중 93%가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 집중됐다.

관련 현상이 가장 극심한 곳 중 하나가 나이지리아다. 다국적 기업과 현지 은행들이 나이지리아 중앙은행에 현지 통화인 나이라화를 예치하고 정당하게 달러 환전을 요청했지만 중앙은행이 달러를 제때 지급하지 못해 쌓인 미결제 외환 의무인 이른바 'FX 백로그'가 국가 경제의 신뢰를 무너뜨렸다는 지적이다.



올라예미 카르도소 나이지리아 중앙은행 총재는 2024년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포렌식 감사 결과 약 70억 달러의 백로그 중 24억 달러에서 불규칙성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환전 창구가 막히자 다국적 기업들은 비전통적 자금 회수 대안을 마련했다. 초기에는 시장 철수가 잇따랐다. 영국 제약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 나이지리아 법인은 달러 부족과 환율 폭락의 직격탄을 맞아 2023년 상반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반토막 난 77.5억 나이라로 급감하자 직판 체제를 종료했다. 여기에 본사로 달러 송금마저 전면 차단되자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은 "더 이상 대안이 없어 사업 운영을 종료한다"고 밝혔다.

반면 내수 시장을 포기할 수 없는 기업들은 공급망을 바꿨다. 유니레버는 현지 수입 원료를 내수 조달로 대체했다. 달러 수요를 없애고 잉여 현금을 실물로 즉시 소진하는 '실물 헤지' 전략이다. 예를 들어 나이지리아 법인의 경우 치약 제조에 필수적인 원료인 소르비톨의 전량 수입을 중단했다. . 대신 나이지리아 업체로부터 대체 원료를 직접 조달하는 방식으로 밸류체인을 뒤집었다.
묶인 돈으로 원자재 매입
일부 다국적 기업은 현지 잉여 통화를 환금성이 높은 수출용 원자재로 매입해 제3국에 판매하는 '현물화'를 확대하고 있다. 이는 단순 물물교환이 아닌 특수목적법인과 파생상품을 결합한 '구조화 무역 금융'의 형태를 띤다. 작동 방식은 이렇다. 다국적 기업은 현지 법인이 보유한 나이라화나 이집트 파운드화로 현지에서 생산되는 원자재나 상품을 대량으로 매집한다.

이때 매집 대상은 런던금속거래소나 시카고상품거래소에서 달러 기반으로 가격이 투명하게 연동되는 품목이 선호된다. 이후 이 실물 자산을 본국이나 제3국의 트레이더 등에게 수출하고, 수입자로부터 최종 결제 대금을 달러나 유로로 지급받아 묶여 있던 자금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투자은행(IB)이나 대형 종합상사들이 개입해 자금의 흐름을 설계한다. 해상 운송 중에 발생하는 상품 가격 변동 리스크를 파생상품 선물 매도를 통해 헤징하며 막대한 수수료 수익도 창출한다.

최근 핵심 원자재 가격의 상승은 이런 현물화의 유인을 더욱더 강하게 자극했다는 분석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글로벌 산업의 핵심 지표로 불리는 국제 구리 가격은 2023년 연평균 톤당 8490달러에서 지난달 월평균 1만3012달러로 약 53%나 급등했다.

커피(아라비카) 가격 역시 이상 기후에 따른 브라질 등의 작황 부진으로 2023년 kg당 4.54달러에서 지난달 8.02달러 수준으로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 현지 통화를 썩히는 대신 달러로 환산 시 가치가 오르는 구리나 커피를 매집하는 것이 기업의 재무 담당자 입장에서는 단순히 자금을 회수하는 것을 넘어 인플레이션을 방어하는 가장 합리적인 자산 배분 전략으로 작용한 것이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기준 글로벌 무역 금융 격차는 2.5조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외화 부족으로 인해 정상적인 수출입 신용장을 개설하지 못해 무산되는 무역 거래의 규모가 커졌다는 뜻이다.
현물화 전략의 부작용
현물화 전략으로 새로운 재무·법적 불확실성도 생길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우선 원자재 가격 변동성으로 자본 손실 위험이 있다. 기후에 민감한 농산물은 특히 취약하다. 2024년 톤당 9000달러를 돌파했던 코코아 선물 가격은 고점 대비 약 50% 폭락하는 패닉 장을 보였다. 달러 회수를 위해 코코아 실물을 헤지 없이 매집한 기업은 환차손 대신 막대한 실물 자산 손실을 볼 수 있다.

컴플라이언스 위반 및 제재 회피 의혹도 있다. 실물 기반의 우회 무역은 국제 제재를 받는 적대국의 무역 회피 수단과 유사성을 띨 수밖에 없다. 지난해 8월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서방 제재를 받는 러시아는 2025년 하반기 자국 밀과 중국산 자동차를 맞교환하는 대규모 현물 거래를 최소 8건을 성사했다. 다국적 기업의 비공식 실물 거래가 확대될 경우 자금 세탁 우회 의혹으로 번져 평판 리스크를 유발할 우려가 있다.

거래 마찰 비용이 증가할 우려도 있다. 전산망으로 처리되던 외환 거래가 실물 구매, 해상 운송, 파생상품 헤징 등 복잡한 절차로 대체되며 수수료 등 각종 비용이 급증했다. 이는 기업 수익성을 갉아먹는 매몰 비용이 될 수 있다. 관세와 환율 통제가 얽힌 상황이 글로벌 기업에 전례 없는 재무적 곡예를 요구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글로벌 무역 결제 방식의 퇴행은 글로벌 결제망 파편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달러 유동성이 풍부한 국가 간의 정상적 신용 거래 블록과 외환이 고갈돼 바터 경제로 회귀한 블록으로 글로벌 무역 체제가 이원화된 것이다. 신흥국의 부채와 외환 취약성이 글로벌 무역 성장과 자본 이동을 제약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글로벌 무역 시스템의 분절은 글로벌 경제에 이른바 '지정학적 인플레이션 세금'도 부과한다. 재화가 최적의 경로로 운송되는 대신 기업의 자금 회수라는 재무적 목적을 위해 제3국으로 우회하며 발생하는 운임 상승, IB 구조화 수수료, 헤지 비용 등은 최종 소비재 가격에 고스란히 전가된다. 이는 중앙은행의 금리 정책만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비용 인상형 인플레이션'의 구조적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트랩드 캐시' 확산과 현물화 트렌드는 한국 경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수출업체가 현지 판매 대금을 적기에 회수하지 못할 경우 장부상 흑자에도 쓰러지는 '흑자 부도'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이런 문제를 잘 다루는 종합상사의 몸값이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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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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