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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없어도 머물고 싶다…종교가 물들인 공간들 [진세인의 공간 교과서]

입력 2026-02-24 16:39   수정 2026-02-24 16:44



종교 건축은 오랫동안 ‘내부자’를 위한 건축이었다.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상징과 의례, 교리의 언어가 공간을 구성했다.

그런데 최근의 종교 공간은 다른 장면을 만든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아도, 교리를 알지 못해도, 어떤 성지와 법당, 채플과 기념관에 들어서면 이유 없이 머물고 싶어진다.

이 변화는 신앙의 확장이 아니라 공간의 재정의에서 시작된다. 종교 시설이 스스로를 ‘성역’이 아니라 ‘도시의 쉼터’로 위치시키기 시작하면서다. 빠르고 밀도 높은 도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속도를 낮출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설명보다 먼저 작동하는 것은 구조다. 길을 길게 만들고, 조명과 빛을 직접적으로 쏟아붓지 않으며, 진입을 깊게 두는 방식. 이런 장치들은 교리를 몰라도 몸의 움직임을 바꾼다. 걷는 속도가 느려지고, 시선이 정돈되며 체류가 가능해진다.

그 구조를 함께 경험하게 되면서 종교 건축은 특정 신자를 위한 시설을 넘어, 도시가 공유할 수 있는 인프라로 작동한다. 신앙을 전제하지 않아도 머물 수 있는 공간. 그 조건에서 오늘날 종교 건축의 새로운 역할이 드러난다.
남양 성모성지, 성지가 공원이 될 때


남양 성모성지는 그 전환을 가장 큰 스케일로 보여준다. 경기 화성의 남양 성모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순교지를 기억하는 장소이자, 1991년 한국 교회 최초의 성모 마리아 순례성지로 선포된 곳이다. 통일기원 대성당은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했다.

이 건축의 핵심은 형태보다 배치에 있다. 대성당은 언덕 사이의 계곡에 편입되듯 놓여 있다. 탑을 제외하면 대성당은 지형을 따라 낮게 자리 잡는다. 방문자는 경사지 아래의 광장에서 시작해 묵주기도의 길을 따라 천천히 상승한다. 이 동선은 대성당으로 향하는 접근 뿐만아니라 시간을 확보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걷는 동안 도시의 소음은 멀어지고, 시야는 점차 좁혀졌다가 다시 열린다.

건물 내부는 더욱 강렬하지만 절제되어 있다. 붉은 벽돌이 주재료로 사용되며, 장식은 최소화된다. 두 개의 원통형 탑은 상징이면서 동시에 빛을 끌어들이는 구조체다. 탑 상부의 개구부와 천창을 통해 들어온 자연광은 수직으로 떨어지며 제대 방향을 정렬한다. 인공 조명보다 자연광이 공간의 중심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이 성당은 ‘보여주는 건축’이 아니라 ‘집중시키는 건축’을 경험할 수 있다.



특히 빛은 하루 동안 계속해서 변화 한다. 아침과 오후의 채광 각도에 따라 제대 주변의 명암이 달라지고, 벽돌 표면의 질감도 다른 표정을 만든다. 공간은 고정된 상징보다 시간에 반응하는 구조에 의해 완성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성지의 공간들이 ‘의례만을 위한 장소’로 닫혀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광장과 외부 공간은 지역 주민의 산책로로 사용되고, 성지는 순례 공간이면서 동시에 열린 공원처럼 기능한다. 고대 바실리카가 도시의 공공 집회 장소였던 전통을 현대적으로 이어가는 방식이다.

이곳에서의 조용함은 종교적 배타성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지형, 동선, 빛, 재료가 만들어낸 물리적 질서에서 나온다. 그래서 신앙 여부와 무관하게, 방문자는 자연스럽게 속도를 낮추게 된다.
원불교 원남교당, 밀도 높은 도시 속 느린 구조


서울 도심의 원불교 원남교당은 같은 질문을 더 고밀도의 조건에서 다룬다. 조민석(매스스터디스)은 이 종교 건축물을 '적극적 연결'과 '의도적 단절'이라는 목표 위에 세웠다. 부지를 감싸는 회백색 노출 콘크리트는 외부의 소음과 간섭을 차단하는 동시에, 건물이 드러앉은 주변 세 필지를 잇는 일곱 개의 골목을 연결하는 비정형의 형태와 배치를 통해 도시와 관계를 맺는다.

남양성모성지가 지형과 배치로 속도를 조정했다면, 원남교당은 공간의 대비와 형태 그리고 사람이 이동하는 동선으로 조정한다. 대각전은 특히 속도를 다루는 공간이다. 전면의 원상을 향해 좌석이 구성되고, 천창에서 내려오는 자연광이 시간에 따라 내부를 바꾼다. 빛은 고정된 상징이 아니라, 공간을 천천히 변화시키는 요소로 작동한다. 외부의 밀도와 내부의 정적이 대비되면서, 도심 한복판에 별도의 환경이 형성된다.

이곳에서 열리는 음악회와 문화 프로그램은 종교 공간이 단절된 성역이 아니라, 도시의 회복 장치이자 문화적 그릇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요함은 폐쇄의 결과가 아니라 설계된 의도에서 비롯된다.
멍때림채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강화의 멍때림채플은 환대의 언어를 더욱 직접적으로 공간으로 전환한다. 공식 소개에서부터 “누구에게나 열린 공공 채플”로 규정된다. 종교 용어보다 ‘멍때림’이라는 일상어를 내세운 선택은, 방문자에게 신앙의 자격을 묻지 않겠다는 의미다.

순수한 콘크리트 볼륨은 땅에서 살짝 들어 올려 일상과 거리를 둔다. 내부는 최소한의 재료와 개구부로 구성된다. 바다를 향한 단 하나의 창, 빛을 받는 벽, 천창으로 열린 하늘. 장식은 없다. 기능도 과장되지 않는다.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확보된다.

남양 성모성지가 지형으로, 원남교당이 동선과 공간 밀도의 대비로 속도를 조정했다면, 멍때림채플은 극단적 단순화로 속도를 멈춘다. 현대 도시는 끊임없이 반응과 선택을 요구한다. 이 채플은 그 요구를 중단시키는 환경을 만든다. 시야를 단순화하고, 소리를 낮추고, 머무는 시간을 확보한다. 종교적 상징보다 공간의 조건이 먼저 작동한다. 그래서 이곳은 예배당이면서 동시에 회복의 장치가 될 수 있다.
탄허기념관, 수행과 배움의 적층


탄허기념관은 수행과 배움이 한 건물 안에서 적층되는 방식으로 같은 질문에 답한다. 대모산 기슭에 놓인 이 기념관은 종교시설이면서 동시에 강학과 전시, 연구의 기능을 품는다.

입구의 108개 기둥은 전통을 장식으로 복제하지 않고, 통과의 구조로 은유적으로 재해석한다. 기둥 사이를 지나며 시야는 반복적으로 끊기고 다시 열리고, 이동 자체가 하나의 과정이 된다. 상징은 정면에 놓이기보다 동선 속에 삽입되며, 현대적인 감각으로 체감된다.



외벽 한 면에 새겨진 금강경 텍스트 역시 읽히기 이전에 빛을 거르는 표면으로 작동한다. 낮에는 빛을 걸러내는 필터가 되고, 밤에는 내부의 조명이 바깥으로 스며 나오며 건물의 존재를 도시 쪽으로 확장한다. 상징은 과시되지 않는다. 환경과 장면으로 변환된다.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상징이 아니라 물리적 장치가 감각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내부의 ‘공간 안의 공간’ 구조는 예불 공간과 공공 강의 공간을 분리하면서도 한 건물 안에 공존시킨다. 종교시설이면서 동시에 도시의 지식 인프라로 작동하는 사례이다.

성모성지가 지형으로 속도를 조정하고, 원남교당이 밀도로 환경을 만들고, 멍때림이 비움을 선택했다면, 탄허기념관은 배움과 수행을 하나의 구조 안에 겹쳐 놓는다. 상징을 드러내기보다, 생활 속 환경으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교리 없이 설득하는 공간의 의미

네 공간은 서로 다른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지만, 공통의 구조를 공유한다. 깊은 문턱, 점진적으로 깊어지는 동선, 조절된 자연광, 그리고 물성이 만드는 정직한 밀도. 이 장치들은 교리를 직접 설명하지 않지만, 몸의 움직임을 바꾼다.

도시의 피로는 공간의 부족이 아니라 속도의 과잉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하고 반응해야 하는 환경 속에 놓여 있다. 좋은 종교 건축은 그 반대의 조건을 설계한다. 이동의 시간을 확보하고, 빛을 조절하고, 체류를 가능하게 한다.

그 결과 우리는 신앙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환경에 의해 멈춘다. 이 멈춤은 감상적 휴식과 더불어, 공간이 만들어낸 감각의 조정이다.

결국 이 네 공간이 제안하는 것은 신앙의 확장이 아니라 도시의 문제다. 고밀도, 고속 사회에서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물리적 장치를 어디에,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더 많은 프로그램이나 더 강한 상징이 아니라, 속도를 조절하는 구조가 공공성을 만든다.

도시의 경쟁력은 더 빠른 인프라가 아니라, 멈출 수 있는 공간의 밀도에서 결정될지 모른다.그리고 그 느림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문턱의 깊이와 빛의 각도 같은 구체적인 건축 요소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글·사진=진세인 공간교과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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