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소 명절이란다.” 어른들은 설 쇠고 처음 맞는 축일(丑日)을 ‘소날’ ‘소 명절’이라고 불렀다. 음력 정월의 첫 번째 축일이어서 상축일(上丑日)이라고도 했다. 이날 하루만큼은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마음껏 쉬게 했다. 음식도 제일 좋은 것으로 먹였다. 쇠죽을 쑬 때 각종 나물과 콩을 함께 삶고, 여물에도 쌀겨와 밀기울 등을 넣어 진수성찬을 차렸다. 집에서 가장 소중한 일꾼이자 가족과 다름없는 생구(生口)를 사람처럼 대접하고 위로했다.
힘든 일을 해야 할 시기가 오면 건초나 여물보다 신선한 풀을 더 많이 먹였다. 소에게 풀을 먹이는 일은 주로 아이들이 맡아서 했다. 방과 후 소를 몰고 뒷산에 올라 연한 풀 자리를 고른 뒤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소들은 방울 소리를 울리며 보드라운 풀을 뜯느라 여념이 없었다. 쇠꼴을 베다가 쉬면서 봐도 쉴 새 없이 혀를 놀렸다.
그런데 어딘가 아픈 소는 좀 달랐다. 배 속이 불편하거나 몸이 무거우면 천천히 장소를 옮기면서 다른 풀을 찾았다. 소 쌀밥이라고 불리는 안달미나 조리풀도 마다하고 무언가를 탐색했다. 풀잎을 고르는 시간이 길어지고 혀 놀림도 느려졌다. 소 혀에는 2만 개가 넘는 맛봉오리가 모여 있다. 그래서 미묘한 맛의 차이를 하나씩 음미하려는 것이었을까. 시골에서 자란 백석(白石) 시인의 두 줄짜리 시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다.‘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는 인간보다 영(靈)해서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낫게 할 약(藥)이 있는 줄을 안다고// 수양산(首陽山)의 어느 오래된 절에서 칠십이 넘은 노장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치맛자락의 산나물을 추었다’(백석, ‘절간의 소 이야기’ 전문)
황해도 수양산의 노스님이 산나물을 추리면서 들려주는 말을 담담하게 옮긴 시다. 소가 사람보다 더 신령한 것은 제 병을 고칠 약이 있는 곳을 곧바로 찾아내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이럴 때 약은 평소 먹던 풀 사이에 섞여 있는 쓰고 쌉싸름한 향의 질경이류다. 질경이의 단단한 잎맥과 쓴맛이 위와 장의 염증을 치유하니 ‘약과 음식의 근본이 같다’는 약식동원(藥食同原)의 원리가 그 속에 담겨 있다.
백석은 동물행동학이나 생태학의 ‘자기치유’ 개념보다 훨씬 단순한 문장으로 핵심을 말한다. 소는 ‘열 걸음’ 안의 약을 안다. 여기서 열 걸음은 거리라기보다 태도에 가깝다. 아프면 더 멀리 달려가지 말고 더 가까이, 내가 매일 지나치던 풀밭으로 돌아가 보라는 뜻이다. 익숙한 길에서 잠깐 멈추는 일, 몸이 보내는 작은 신호를 믿고 쓴맛을 택하는 일. 치유의 약초밭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이렇게 소는 몸이 알아서 길을 찾지만, 인간은 생각이 많아서 길을 잃곤 한다. 생각에도 소화가 필요하다. 소는 위를 네 개나 가지고 되새김질하는 반추(反芻) 동물이다. 쉬지 않고 풀을 먹지만 하루에 10시간, 3만 번 이상 씹고 되새긴다. 이 되새김은 또 다른 치유의 과정이자 성숙의 통로다. 일상의 상처와 경험, 실패와 성공도 되새김질해야 내 것이 된다.
어른들한테 들은 ‘불난 집 소 이야기’도 생각난다. 집에 불이 났는데 소가 외양간에서 나가지 않아서 애를 태우던 중 누군가 구유(먹이통)를 뒤엎자 그제야 뛰쳐나왔다는 이야기다. 소를 꼼짝하지 못하게 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익숙함의 족쇄였다. 구유가 뒤엎어지는 순간에야 소는 알아차렸다. 우리가 어떤 위기에서 꼼짝하지 못하는 것도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박제된 구유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변화 역시 ‘고삐를 더 죄는 일’이 아니라 ‘구유를 옮기거나 뒤집는 일’에서 시작된다.
비슷한 일화가 미국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의 일기에 나온다. 에머슨이 59번째 생일을 맞은 날, 아들과 함께 송아지를 외양간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애썼지만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한참을 실랑이하는 중에 아일랜드 출신 하녀가 다가와 송아지 입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랬더니 송아지가 입에 들어온 손가락을 어미 젖처럼 빨며 순순히 따라 들어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를 활용한 ‘상속의 지혜’를 보자. 한 노인이 소 17마리를 남기고 죽으면서 큰아들에게 2분의 1, 작은아들에게 3분의 1, 막내에게 9분의 1을 가지라고 유언했다. 아무리 나눠도 답이 나오지 않자 아들들은 동네 어르신에게 답을 구했다. 어르신은 “소 한 마리를 빌려줄 테니 18마리 중 각각 9마리, 6마리, 2마리를 갖고 남은 한 마리는 돌려주게”라고 했다.
이 우화의 핵심은 관점을 바꾸는 데 있다. 똑같은 전제에 갇히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전제를 바꿔야 한다. 소 한 마리를 빌려주는 발상처럼 관계와 계산을 살리면서 다툼까지 해결하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치유란 상처를 꿰매는 일만이 아니라 싸움이 생기지 않도록 구조를 바꾸고 서로의 몫을 해치지 않으면서 전체를 살리는 일이다. 백석 시의 소가 치유의 풀밭으로 갔다면 이 우화의 소는 분쟁의 풀밭을 마음의 약초밭으로 바꿔준 것이다.
또다시 봄이다. 내 삶의 열 걸음 안에 있는 풀밭은 어디인가. 내 마음의 구유는 무엇일까. 그 구유를 지키느라 정작 외양간 밖으로 한 발도 내딛지 못하는 건 아닐까. 송아지의 스위치를 찾고 소 한 마리를 빌려주는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백석의 노장이 한마디 덧붙인다. 소가 영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둔감해졌다고, 열 걸음 안의 약을 자꾸 멀리서 찾느라 발밑의 풀잎을 보지 못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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