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힐튼 호텔은 결국 문을 닫았다.

대칭을 이루는 아름다운 계단과 고풍스러운 브론즈 기둥. 호텔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천창에서 떨어지는 우아한 빛이 방문객을 조용히 감싼다.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제자인 건축가 '김종성'이 설계한 호텔이다. 그는 스승의 건축사무실에서 12년을 함께 일하며 배운 것들을 서울의 땅 위에 새겨 넣었다. 불필요한 장식을 덜어내고, 오직 비례와 빛으로 공간을 구성하는 것. 힐튼 호텔은 그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이 호텔은 사라졌다. 이유는 단순하다. 충분한 매출을 내지 못하는 지금의 호텔을 유지하느니, 허물고 더 크게 다시 짓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1983년 당시 허용 용적률은 600%였고, 힐튼 호텔은 이를 다 채우지 않고 350%로 지어졌다. 그리고 현재의 허용 용적률은 800%이다. 현재의 힐튼 호텔보다 2배 이상 크게 지을 수 있는, 이른바 사업성이 있는 것이다. *용적률은 건물을 지을 '대지 면적'에 대한 '지상층 면적 합계'의 비율이다.)
우리가 힐튼 호텔을 기억하는 이유가 천창의 빛이나 아름다운 계단 때문만은 아니다. 그 공간만이 가진 고요함과 품위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조금씩 사라져가는 힐튼 호텔을 바라보며,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떠올렸다. 이 영화 역시, 한 호텔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네 겹의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①소녀가 묘지에서 ②작가를 추모하고, 그 작가는 자신의 젊은 시절 방문한 한 호텔의 ③노인(제로)을 추억하고, 그 노인은 ④구스타브와의 일화를 회고하며 그리움을 드러낸다. 소녀에서 작가로, 작가에서 제로로, 제로에서 구스타브로 기억이 기억을 이끌어내는 구조다. 이 구조로 영화는 첫 장면부터 이미 지나간 것들에 대한 이야기임을 선언한다.
산 위에 당당히 선 분홍빛 호텔. 누구나 한 번쯤 묵고 싶은 그곳,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다. 그러나 곧바로 36년 뒤의 모습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이제는 몇몇 단골만 방문할 뿐인 쇠락한 호텔을 방문한 작가는, 손님 하나 없는 로비에 홀로 앉은 노인 제로에게 말을 건다. 제로는 젊은 작가의 관심이 반가웠는지 오래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성기의 호텔은 분홍빛 외벽을 가지고 있었고, 설산에 잘 어울렸다. 파란 지붕과 아치형 창문들이 빼곡히 늘어선 파사드는 두 팔 벌려 손님을 환대한다. 이 건물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 어딘가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런 곳이 존재할까 싶을 만큼.
로비로 들어서면 공간은 더욱 풍성해진다. 보라색 유니폼을 입은 수많은 직원이 손님을 맞이하고, 황금빛 조명 아래 우아한 장식이 벽면을 채우며, 붉은 카펫이 자연스레 동선을 이끈다. 이 호텔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사람은 컨시어지 구스타브다. 신입 로비 보이인 '제로'가 그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며 호텔의 이것저것을 배워나간다. 호텔 전체는 구스타브의 손짓 아래에 하나의 시스템처럼 정밀하고 우아하게 작동한다.
구스타브는 기품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이다. 동시에 확실히 좀 괴짜이기도 했다. 그는 호텔을 찾는 돈 많고 나이도 많은, 외로운 여성 손님들과 늘 선을 넘는 관계를 이어왔다. 수많은 내연녀 중 한 명의 부고 소식이 들려오자, 그는 곧장 그녀의 저택으로 달려간다.
시신 앞에서도 손톱과 피부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누명을 쓰고 수감된 감옥에서 탈출 지도를 건네받은 순간에도, 지도에 그려진 그림의 아름다움에 먼저 감탄한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향수를 챙긴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자신의 세계를 품위 있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전쟁이 시작된다. 분홍빛의 화사한 호텔은 회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로 채워졌다. 새로운 세계가 구스타브의 세계를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 체제의 전복을 꿈꾸는 군인들에게 구스타브의 품위 있는 이야기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열차에서 군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구스타브가 살아생전 약속한 대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포함해 그의 모든 재산은 제로에게 돌아갔다. 이제는 그가 호텔을 이어가게 되었다.
제로는 구스타브와 같은 사명을 공유한 사람이었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그 사명의 결정체였다. 제로는 호텔의 품위를 놓지 않으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러나 호텔은 시대를 이겨내지 못했다. 아치형 창문들과 아름다웠던 파란 지붕은 무심히 잘려 나갔고, 로비의 황금빛 조명은 어떤 온기도 없는 창백한 형광등으로 교체되었다. 기품을 드러내는 양식은 사라지고 최소한의 기능만 남았다.
그러면서도 제로는 상속받은 모든 재산 중에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하나만큼은 끝까지 손에 쥐고 있었다. 전후에 들어선 새로운 권력이 부유층의 재산을 하나씩 강탈해가는 와중에도, 다른 모든 재산을 헌납하며 적자투성이의 낡은 호텔만은 끝까지 지켜냈다.
장면은 다시 작가와 제로의 대화로 돌아온다. 제로는 작가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신의 작고 초라한 호텔 방으로 돌아갔다.
"솔직히 내 생각엔, 구스타브의 세상은 그가 들어서기 전에 이미 사라졌네.
그가 멋진 품위로 그 환상을 분명히 지켜내고 있었던 거지."
④구스타브는 이미 저물어가는 세상에서 자신의 품위를 끝까지 지키려 했고 제로도 그 신념을 이어갔다. ③제로를 통해 구스타브의 이야기를 들은 ②작가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소설로 만들어 출간했다. 수십 년이 지나 한 ①소녀가 그 소설을 추억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영화는 처음과 반대의 순서로 마무리된다.

사실 나는 힐튼 호텔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 호텔을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영화 속 작가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에서의 작가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전성기를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제로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그 호텔의 기억을 남겼다. 아마 나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대의 건축가지만, 그가 남긴 원칙들은 여전히 유효하고 기품있다. 건축가 김종성은 그의 제자이다. 스승의 건축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방식으로 서울에 힐튼 호텔을 지었다. 그러나 결국 그 건물은 사라졌다. 구스타브와 제로의 이야기를 남긴 작가처럼 나도 힐튼 호텔을 이 글로 전한다.
소녀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추억하듯,
여러분들도 힐튼 호텔을 한 번쯤 생각해주기를.
최영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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