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2030 클래식 음악가들이 세계 음악계의 심장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동양에서 온 콩쿠르 스타, 극소수의 솔리스트로 이름을 알리던 이들이 이제 수백 년 역사의 오케스트라 악장석에 앉고, 세계 최고 음악대학의 교단에 선다. 탁월한 기량의 음악가 개인의 성취는 물론 복합적인 구조적 요인이 맞물린 결과다.
악단의 심장을 맡기다

최근 35세의 바이올리니스트 이깃비가 프랑스 피카르디 국립 오케스트라의 종신 악장에 올랐다. 악단 역사상 최연소이자 여성 최초, 동양인 최초에 종신직이다. 그는 40년간 악단을 이끈 유럽계 남성 악장의 뒤를 이어 악단을 진두지휘한다. 뒤이어 바이올리니스트 정주은(30)이 프랑스 서부의 명문 악단 페이 드 라 루아르 국립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임명됐다. 네 차례 오디션을 거쳐 통과한 그는 오는 9월부터 악장으로 활동한다.
세계 최정상급 3대 오케스트라에도 한국계 젊은 음악가들이 안착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해나 조(바이올린·32),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의 이재원(바이올린·40), 베를린 필하모닉의 박경민(비올라·36)이 각 악단의 정식 단원이다.

그중 해나 조는 지난해 빈 필 183년 역사상 최초의 한국계 정식 단원으로 기록을 썼다.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들의 두터웠던 '장벽'을 허물었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148명 단원 중 아시아계는 6명, 그중에서 해나 조는 유일한 100% 아시아계 단원이다. RCO의 이재원, 베를린 필의 박경민 역시 해당 악단의 유일한 한국인 음악가다. 플루티스트 유채연(25)은 200년 전통의 독일 함부르크 필하모닉 종신 수석, 첼리스트 김다원(31)도 478년 전통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정식 단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 릴레이의 눈에 띄는 시작점은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의 행보였다. 세계 최정상급 솔리스트로도 손색없는 그는 2018년 26세에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종신 악장에 올랐다. 450년 전통의 명문 악단 역사상 최초의 여성·최연소·동양인 악장으로 물꼬를 텄다. 1570년 창단해 푸르트벵글러·카라얀 등 전설적인 지휘자들이 이끌어온 악단이다. 독일권 보수적인 악단에서 시작된 이 바람은 유럽 전역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확산됐다.
미국에서 유럽으로, 달라진 유학길

유난히 보수적이었던 유럽 악단이 한국계 젊은 단원들을 악장 및 수석, 그리고 종신직으로 영입한 것은, 물론 '순혈주의'를 깨뜨린 실력의 승리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클래식 음악계의 환경 변화 등 외부 요인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서 유럽으로 확장된, 달라진 유학 지형도가 큰 요인이다.
과거 한국 음악 유학생들은 귀국 후 교수직을 목표로 주로 미국행을 택했다. 노승림 숙명여대 교수는 "음악 전공자의 경제적 계층이 중산층으로 확대되면서 학비 부담이 덜한 유럽으로 유학이 늘었다"며 "유럽에서 앙상블·오케스트라 교육을 자연스럽게 받게 된 것이 해외 악단 진출의 토대가 됐다"고 분석했다.
때마침 유럽 악단들의 다문화 정책도 맞물렸다. 수백 년간 백인 남성 중심이었던 유럽 오케스트라들이 여성과 유색인종 비율을 늘리는 방향으로 변화하면서, 실력 있는 한국계 여성 음악가들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 유럽 내 젊은 세대의 클래식계 이탈로 경쟁자가 줄어든 것도 영향을 미쳤다. 좁아진 솔리스트 시장에서 오케스트라로 눈을 돌린 실력파 한국 음악가들이 그 빈자리를 채운 셈이다.
달라진 미디어 환경과 음악을 듣는 방식의 변화도 이들의 입성을 가능케 했다. 해나 조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예전에 비해 이젠 어디서나 빈 필의 원본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시대가 됐다"며 "미스테리한 빈의 소리는 뭘까 고민하며, 2년간 빈 필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면서 따뜻하고 우아한 빈의 소리를 배우려고 애쓴 덕에 단원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교단으로 간 한국인

무대를 넘어 교단에서도 한국계 음악가들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피아니스트 한지호(34)가 2024년 미국 인디애나 음악대학 피아노과 최연소 교수로 임용된 데 이어, 플루티스트 최나경도 같은 학교 교수진에 이름을 올렸다. 인디아나 음대는 줄리어드 음악원, 뉴잉글랜드 음악원 (NEC) 등과 함께 미국의 명문으로 꼽힌다. NEC에는 피아니스트 손화경·백혜선 교수가 오랫동안 명성을 쌓아왔고, 2003년엔 임윤찬의 스승인 피아니스트 손민수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NEC로 자리를 옮겨 화제가 됐다.
유럽에서는 영국 왕립음악원(RCM)에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32)가 한국계 최초로 교수로 부임했고, 독일 한스 아이슬러 음악대학에도 한국인 음악가들이 조교수로 잇따라 이름을 올렸다.

교단의 한국계 음악가가 늘어난 것도 여러 맥락이 존재한다. 한지호 교수는 인터뷰에서 "유튜브의 발달로 실력 있는 연주자가 노출될 기회가 늘면서, (교육계에 진입할) 기회도 함께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물론 유럽의 음악대학 지원자 중 한국·중국·일본 학생 비중이 급증하면서, 이들이 한국인 교수에게 배우기를 선호하는 경향도 뚜렷해졌다. 학교 입장에서는 한국인 교수 영입이 곧 학생 모집 경쟁력이라는 것이다. 임윤찬·조성진 같은 세계적 콩쿠르 우승자를 배출한 한국 교수진의 지도 노하우에 대한 수요도 높아졌다.
한 교수는 "한국 음악가라고 하면 실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 실력대로 뽑으면 한국 학생만 뽑힌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라며 달라진 위상을 전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본기를 닦기 위해 헌신한 노력,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다양한 도전을 주는 교육 방식이 학생들의 발전을 이끄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물론 여전히 넘어야 할 벽은 있다. 주요 음악대학 대형 학과의 풀타임 한국인 교수는 아직 소수다. 유윤종 음악 평론가는 "한국 연주자들이 해외 음대와 악단의 중요 직책을 차지하고 있지만 정책을 결정하고 담론을 주도하는 행정가 계층이나 장기적 영향력을 갖는 위치에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 천장이 존재한다"며 "앞으로 현지의 문화와 제도를 섬세히 체득해 시스템 자체에 한국인으로서의 바람직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조민선 기자 sw75j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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