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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평화’는 끝났다…돌아온 핵 각자도생 시대

입력 2026-03-13 06:41   수정 2026-03-13 06:42

[비즈니스 포커스]



“위험한 세상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두려움의 대상이 돼야 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핵탄두 증강 방침을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냉전 이후 핵 군비 경쟁을 억제해 온 마지막 장치였던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뉴스타트)’이 종료됐다. 나토 동맹의 균열 속에서 유럽은 이제 프랑스를 중심으로 ‘핵 각자도생’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빗장 풀린 핵무기, 종잇조각 된 국제법


2010년 체결 이후 미·러 양국의 핵탄두 수를 각 1550개로 제한, 세계 안보의 최후 보루였던 뉴스타트가 지난 2월 5일 아무런 후속 대책 없이 공식 종료됐다. 이로써 미·러·중 ‘빅3’는 사실상 제약 없이 핵무기를 찍어낼 수 있는 ‘무한 군비 경쟁’의 시대에 진입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월 7일 국제기구 66곳 탈퇴 각서에 서명했다. “미국의 돈으로 타국을 지켜주는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이다. 실제로 미 특수부대가 국제기구를 패싱하고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한 사건은 ‘국제법 무용론’에 쐐기를 박았다.

강대국이 국익을 위해 규범을 깨기로 결정할 때 이를 막을 ‘상위 권력’은 국제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다.

국제정치학의 석학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저서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에서 “국제사회에는 국가를 처벌할 상위 권력이 없다”며 “국제사회는 중앙집권적 권력이 없는 ‘무정부 상태’(Anarchy)이며 강대국은 규범을 깨는 것이 자국의 생존과 이익에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국제기구의 협약쯤은 언제든 무시한다”고 말했다.

4년째 우크라이나 침공을 멈추지 못하는 유엔,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체포영장을 비웃듯 해외를 활보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행보는 국제기구가 ‘이름값’을 못 하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됐음을 보여준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명예연구위원은 ‘뉴스타트 이후: 새로운 핵 군비 경쟁의 시대가 열리는가’ 리포트에서 “뉴스타트는 단순히 ‘핵무기 숫자를 줄이는 조약’이 아니라 사실상 핵전쟁 가능성을 낮추는 총체적 관리·검증·예측 시스템이었다”며 “이 보루가 사라진다는 것은 1970년대 이후 처음으로 미·러 전략 핵전력에 대한 어떠한 법적 제약도 없는 ‘무정부 상태의 핵 경쟁’에 진입했음을 의미한다”고 진단했다.

찢어진 美 핵우산…유럽 덮친 ‘핵 자강’ 도미노


미국의 전략적 고립주의가 심화하면서 유럽의 안보 지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 경시’ 노선이 노골화되자 유럽 각국은 미국의 핵우산을 ‘부실 채권’으로 규정하고 독자적인 핵 억지력 확보에 사활을 걸기 시작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러시아와 1300km가 넘는 국경을 맞댄 핀란드에서 나타났다. 안티 하카넨 핀란드 국방장관은 지난 3월 5일 핵무기의 반입과 운송, 소지를 허가하는 법안을 발의하며 수십 년간 이어온 핵 금기 체제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경제 엔진’ 독일마저 금기를 깼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최근 의회에서 자체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공식 언급했다. 독일은 1990년 통일 당시 ‘4+2 협정’을 통해 핵무기 개발 포기를 국제적으로 약속한 국가다.





메르츠 총리가 협정 위반 소지에도 불구하고 핵 개발 논의를 공론화한 것은 트럼프 2기 행정부하에서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을 지속하는 것이 더 큰 리스크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중립국의 대명사였던 스웨덴은 영국·프랑스와 독자적인 핵우산 구축을 위한 긴밀한 협의에 들어갔다. 스웨덴은 프랑스 핵무기를 공유하는 방안까지 검토 중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유럽 내에서 안보가 더 이상 공동체적 가치가 아닌 ‘각자도생’의 영역으로 넘어갔음을 시사한다. 영국의 키어 스타머 총리와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주도하는 ‘유럽 독자 핵 연대’는 미국의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인 동시에 핵무장이라는 종국적 수단 없이는 주권을 지킬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조약에 명시된 ‘글자’보다 영토에 배치된 ‘탄두’를 더 신뢰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핵 억지 질서가 더 이상 동맹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있다.




사고보다 빠른 타격…AI가 허문 ‘핵 금기’


핵 질서가 흔들리는 가운데 전쟁의 양상 자체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 중심에 인공지능(AI)이 있다.

지난 2월 미국이 단행한 대(對)이란 군사작전 ‘에픽 퓨리(Operation Epic Fury)’는 전쟁의 주도권이 인간의 전략적 판단에서 알고리즘의 연산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미 중부사령부는 생성형 AI 모델을 정보 평가와 표적 추적에 투입해 단 12시간 만에 90곳의 표적을 정밀 타격했다.

문제는 AI가 전쟁의 효율성을 높이는 수준을 넘어 인류가 수십 년간 지켜온 ‘핵무기 사용 금기’까지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 킹스칼리지런던(KCL)의 케네스 페인 교수 연구팀이 AI 모델들을 가상 국가 지도자로 설정해 21개 갈등 시나리오를 실험한 결과 AI는 모의 전쟁의 95%에서 핵무기 사용을 선택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AI는 핵을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효율적 전략 자산’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였다.

군사 전문가들은 AI가 우발적 핵전쟁을 막아왔던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던 ‘인간 개입(Man-in-the-loop)’이 약화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상대보다 0.1초라도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는 ‘기계적 공포’가 핵 경쟁을 더욱 통제 불능의 영역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 억지력은 인류 전체의 공멸로 돌아올 수 있다.




돌아온 핵무장 시대, K핵잠도 빨라질까


유럽이 핵 자강으로 움직이면서 미국의 확장억제에 의존해 온 동맹국들 역시 같은 질문에 직면하고 있다. 그 최전선이 바로 한반도다.

한국에 ‘핵추진 잠수함(SSN)’ 도입은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며 발표한 새 국방전략(NDS)에서 한국에 ‘북한 억제의 주된 책임’을 지우고 미군의 지원을 ‘제한적’으로 규정함에 따라 독자적인 전략 자산 확보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5년 10월 트루스소셜을 통해 “한국에 디젤보다 훨씬 날렵한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승인했다”고 밝히며 파격적인 안보 행보를 보였다. 랜드(RAND)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의 핵잠 보유는 미국의 해군력 부족을 메울 핵심 자산이 될 것”이라며 이를 한·미 동맹의 필연적 진화로 평가했다.

정부는 2030년대 중반까지 5000톤급 핵추진 잠수함 4척 이상 건조를 추진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러시아의 기술 지원을 바탕으로 ‘제2격(Second Strike, 상대편의 선제 핵 공격을 받은 후에 하는 보복 핵 공격)’ 능력을 갖춘 핵잠수함 건조를 가속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다.

하지만 중국, 일본 등 주변국의 반발은 변수다.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는 “한국의 핵잠 보유는 중국의 강력한 경제 보복을 부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 내에서도 “한국의 핵잠 확보가 일본의 독자 핵무장 논의를 촉발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결국 이번 핵잠 추진의 핵심은 ‘기술 주권’의 확보에 있다. 정부는 핵잠 건조 승인과 맞물려 저농축 우라늄 자급과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권한 확대를 골자로 한 한·미 원자력 협정 개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상현 명예연구위원은 “미·러 핵질서 붕괴는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는 수많은 동맹이 가진 확장억제에 대한 신뢰를 약화할 것”이라며 “한국 내 핵 잠재력, 전술핵 재배치, 자체 핵무장 논의도 구조적으로 증폭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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